연말 결산

자고로 연말 결산은 정확히 마지막 날에 써야 제 맛이라고들 했는데,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내일은 분명히 먹고 마시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 그냥 오늘 쓰는 게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벌써 31일이기도 하고… 어쨌든 그렇게 먹고 마셔보려고 퇴근길에 총알도 넉넉하게 채워왔다. 진짜 샴페인은 뭔가 축하할 일이라도 있을때 마셔야만 할 것 같다는 강박에 시달려서, 대신 프로세코를 집어왔다(마지막으로 마셨던 샴페인은 2006년 마지막 날 시애틀의 어느 호텔에서 불꽃놀이 보고 마셨던… 혼자서는 샴페인 다시 마실 것 같지 않다, 그 다음부터는). 참고로 저 총알들의 전체 가격은 저들 가운데 어느 한 병을 우리나라의 그저 그런 와인바에서 시켜 마시는 정도?

어쨌든, 동어반복의 우려가 깊으므로 본문은 접기로.

올해 초, 찬 바람에 봄이 다가올 엄두를 채 내지 못하던 어느 날 새벽이었을거다. 한 시? 아니면 두 시쯤? 나는 그 시간까지 일하고 나서 누군가를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나를 타박했다. 그렇게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면 그걸 직업으로 택하지 왜 건축을 하느냐고. 농담이라고 듣기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어투였고, 나는 그를 내려주고 먼 길을 돌아 내 집으로 향하면서 마음 먹었다. 이런 일이 내 삶에서 다시는 일어나도록 하지 말아야겠다고. 예의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일방통행을 하면 삶이 진저리치게 싫어지기 마련인데, 그런 감정을 더 이상 가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정말 더 이상은.

누군가와 그런 얘기를 했었다. 철저하게 기본적인 예의,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사람이라는 그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잘 대해주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게 그런 바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뭔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고. 나는 그 얘기에 더 이상 공감할 수가 없었다.

올해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해로 기억될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내가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가져온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여기에서의 희망은 절대적으로 불특정한 다수를 향한 것이었다. 기본적인 예의도 있었고, 또 존중받고 싶었기 때문에 존중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불특정 다수에게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올해를 보내면서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마음 속에 낙인을 찍는 것과 같은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부터, 나의 마음은 편해졌다. 밖을 향해 벽 쌓기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귀를 울리던 소음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벽 안의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벽 안에는 그래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희망을 버림으로써 남은 특정 소수과 더 많은 것을 방해받지 않고 나눌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또 벽을 쌓는 것 따위는 그렇게 두렵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어떻게 보면 오만과 편견을 닮은 감정은 그래도 나 자신이 아직까지는 상식의 지팡이에 기댄 채로 걸어가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겠다는 지긋지긋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두개골을 열어 파내고 파내고 또 파내어도, 그 영양가 없는 강박관념은 살아 남아 정말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왔었다. 남아있던 강박관념이 불러 일으키던 두통에 달아오른 머리를 식혀보겠다고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미친 듯이 몰아 닥치던 그날 밤 밖에 나갔다가 번개를 맞아 두개골을 완전히 박살내고 난 다음에서야 나는 그런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빗물에 모든 조각들이 완전히 쓸려 사라지기 전에 두개골을, 아니 머리 전체를 다시 맞추려고 땅바닥을 엉금엉금 기었었다. 왼쪽 눈을 찾아서 다시 달고 난 다음에는 모든 게 순조로왔다. 뇌 속에 까맣게, 점점이 박혀있던 굴레와도 같던 강박관념들, 그렇게 점이 박혀있던 조각들을 버리고 멀쩡해 보이는 것들만 주워 담고 나니, 전보다 의식이 생생한 기분은 덜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내년에도, 그리고 그 다음, 다음, 다음해에도 이렇게 살고 싶다. 머리로 사는 삶도 이제는 지겹다, 앞으로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by bluexmas | 2008/12/31 14:04 | Life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at 2008/12/31 14: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asic at 2009/01/01 05:09 

사람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해. 라는 말. 슬퍼요.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또 희망을 찾게 되고. 그런 게 인생인 것 같아요. 희망이 없는 삶은 너무 쓸쓸하잖아요. 마음으로 사는 bluexmas님에게. 화이팅!

 Commented at 2009/01/01 10:0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1/02 13:23 

비공개 1님: 비공개님두요.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basic님: 그럼요, 제가 말한 희망은 영양가 없는 사람들에게 가졌던 뭐 쓸데없는 그런 것이라서요. basic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비공개 2님: 총알 두 병 따서 마시고는 오늘 완전히 뻗어 있었답니다. 아주 희망찬 새해의 시작인 것이죠. 술 마시고 늘어져서는… 저도 그냥 자느라고 종소리 따위는 듣지 못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ommented at 2009/01/02 16:0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1/03 13:44 

나도 잘 모르는 것들만 골라서 샀어. 대부분 medium body 이상… 들었는데 2007년 론이 막 나왔는데 좋다고, 해서 물어봐서 한 병 사고, Sangiovese는 저거 아니더라도 마시던게 있는데 역시 추천…Primitivo는 이탈리아에서 나오는 진판델? 2006년이 진짜 잘 넘어가서 막 나온 2007년을 집어왔고, 맨 끝에 녀석은 스페인, 8불짜리였는데 오리고기랑 같이 먹었거든, 좋더라고…

나도 10년 전에 지방간으로 고생해서, 살 빼니까 좋아졌는데… 요즘 살이 많이 쪘냐? 사실은 나도 계속 운동해서 배가 나와서 참 서른 중반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 보고 싶은데, 올해 나가게 될까 모르겠어. 비자 받으러 가긴 가야되는데 휴가가 너무 없어서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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