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still my beating heart

그냥 여느 날과 다름 없는 그런 날의 오후 세 시쯤, 점심시간을 넘겨 시작한 일이 무료하게 느껴지고 삶 역시 그렇게 느껴질 그런 시간, 사장님 여비서 풍으로 하얀 정장을 차려 입은, 선이 굵어서 예쁘다기 보다는 잘생겼다는 말이 어울릴 얼굴의 긴 생머리 여자가 등 뒤로 다가와 살짝 귀뜀해준다. 세 시간 남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사라진다. 잽싸기는, 누가 사장님 여비서 아니랄까봐.

다시 시계를 본다. 오후 세 시… 차가 막힐 시간이 아니므로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잽싸게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겨 회사를 나선다. 일단 단골 가게에 들러 포도주를 한 병 산다. 나를 위해 샀던 것 가운데 가장 비쌌던 것이 30불이었으니까, 이번엔 50불 정도 되는 녀석을 고른다. 이왕이면 보르도로… R이 물어볼지도 모른다, 20불 넘는 건 샀던 기억이 없는데 웬일? 그냥 얼버무리고 가게를 빠져나온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은행에 들른다. 남은 돈을 다 찾는다. 봉투는 예전부터 챙겨서 책상 어딘가에 올려놓은지도 꽤 오래 되었다.

집에 도착하면 네 시나 네 시 반 쯤 되었을 것 같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즐겨입는 청바지에 녹색 갭 티셔츠를 걸친다. 음악을 튼다. 뭘 들어야 될까, 마지막으로 뭘 들어야 될까 한참 생각을 하는데, 딱 한 곡만 떠오르지가 않는다. 시간은 자꾸만 간다… 결국 셔플을 돌린다. 마루에 있는 앰프는 50이상 올리면 귀가 아프니까 45쯤으로 맞춰놓는다. 포도주를 딴다. 담배, 담배를 잊고 있었다. 뭐 가는 마당인데 담배 정도 못 필소냐…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아메리칸 스피릿 청록색 포장은 걸어서 갈 수 있는 집 바로 앞 주유소에서는 팔지 않는다. 다른 날이라면 그냥 못 말보로라도, 아니면 M선배에게 가끔 얻어 피웠던 그 더럽게 맛없는 베이직이라도 필 수 있을 것 같지만, 오늘은 절대 안 된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포도주 잔을 막 기울이다 말고 다시 차를 몰고 밖으로 나선다. 네 시 사십 분, 십 오분 내로 돌아오면 다섯 시니까 적어도 한 시간은 즐길 수 있을거다. 마지막인데 그냥 마시고 몰아주지, 생각하다가 나에게만 마지막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지막이 아닐테니까 그냥 참는다. 게다가 경찰에게 걸리면 골치아파진다. 마지막인데 그렇게 마시고 싶었던 비싼 보르도를 따 놓은채로 놓고 가면 원통할 거다. 오늘 담배 트럭이 안 왔다면서, 점원은 마지막 남은 한 갑을 꺼내서 건네준다.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마지막 남은 한 갑을 피우다 가는거다, 뭔가 말이 된다는 느낌이다. 차에 오르자 마자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오늘따라 연기가 더 파르스름해 보인다.

집에 도착하니 다섯 시 오 분… 생각보다 차가 막혀 5분을 더 허비했다. 그러니까 오십 오 분 밖에 남지 않은거다. 마음이 조금 급해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나는 세 시에 회사를 빠져나와 단골 가게에 들러서 비싼 보르도를 한 병 샀고, 은행에 들러서 가진 돈을 모두 찾았다. 그러니까 가지고 있던 돈 전부… 를 봉투에 넣고 ‘For Funeral’ 이라고 빨간 펜으로 적는다. 사실 봉투 안에는 편지가 들어있다. 주어진 비용으로 화장을 할 것, 절대 화장이다. 매장이 아니라… 봉투에 침을 묻혀 봉하고 소파의 왼쪽, 표고 버섯 갓 색깔의 발 받침 위에 올려 놓는다. 마음이 편해진다. 아이팟은 셔플로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 담배를 사러 나가기 전 따라 두었던 포도주를 마신다. 달다. 뭔가 먹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이왕이면 좀 깨끗한 내장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앉아서 병을 비우면서 여섯 시를 기다린다. 그냥 다 필요없으니 세 시간 전에만 알려주고, 또 그 세 시간 후에는 딱 멈추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가 바로 오늘, 이렇게 찾아왔다. 나는 세 시간 전까지도 이런 순간이 오늘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루한 일을 꾸역꾸역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나쁘지 않다. 생각해보면 이게 훨씬 낫다. 그래서 선택을 했던 것이다. 다섯 시 오십 팔 분, 병에 남아 있는 술을 잔이 넘치도록 부어 천천히 들이킨다. 순간들이, 순간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쉬움은 언제나 따르기 마련이었다.

토요일 새벽, 언제나처럼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젼을 보다가 깨었다. 윗층에 올라가려고 일어났는데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뻗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1층 마룻바닥에 한참을 자빠져 있다가 2층에 간신히 올라가 침대에 몸을 누였던 것 같다. 일요일인 다음날, 하루 종일을 침대에 누워서 보낸 다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 병원을 찾았다. 가끔은, 이렇게 혼자 외딴 곳에서 이 모양으로 살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게 두려움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죽는 건 아쉽지 않은데 고통스럽게 끌다가 가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건강에 신경 쓰느냐고 궁금증 반, 비아냥 반을 섞어 물어보곤 하는데, 이유는 별 게 아니다. 신경 썼다면 얻지 않을 병으로 자리 보전해서 주변 사람들 신경 쓰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생길 확률도 별로 없으니까 더더욱.

…의사는 걱정할 건 아직 없다고, 그냥 심장 스캔이나 한 번 해보자고 얘기했다. 예약을 했는데 가격이 얼마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by bluexmas | 2008/12/10 11:59 |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at 2008/12/10 12:1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2/11 15:30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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