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어차피 내일은 아침에 10마일 달리기를 하러 가야되니까 일하러 가기 좀 그렇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건데 일요일에는 출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주말에 일하자는 얘기도 없이 사람들은 일곱시 반 인가에 다 퇴근하고 나와 J만이 남아있는 상황, J가 Quality Control Review 들어가 있는 동안 개발새발 그려놓았던 몇몇 해결책을 들이밀었더니 비교적 만족하는 눈치였다. 다들 갔는데 나도 가야되겠다 싶어 ‘I will do it Monday then’ 이라고 얘기하고 떠나려는데 왠지 지금 여기에서 일을 딱 놓고 가야될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J가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 스스로 여기까지는 끝내고 가야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언제나 일을하는데에는 흐름이 있기 마련인데 시간이 되었다고 여기에서 끊어서는 안된다는 느낌이 정말 천년만에 들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주말에는 당연히 일 안 하는 것이기는 해도 상황을 보았을 때 나와야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나오게 된 것도 왠지 뭔가 번듯한 기분… 그래서 딱 한 시간을 더 앉아서 일을 다 마무리 지었다. 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는 조직에 속해 남의 돈을 빨아먹고 사는 직장인으로써 스스로에게 가장 뿌듯할 때는 시키는 일을 잘해서 좋은 소리를 들을때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지로 뭔가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때이다. 그냥 그대로 컴퓨터 꺼버리고 가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J는 내가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 가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걸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렇게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게 되는 상황은 그렇게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때로 같은 PDF를 하루에 거짓말 전혀 보태지 않고 백 번씩도 만들게 되는 일을 하고 있노라면. 그래서 정말 아주아주 오랫만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좋았다. 정말이지 이런 날은 일년에 열흘도 채 안 된다. 퇴근하면서 기분 좋은 날, 나 자신에게 만족하는 날이.

오늘은 만성절 Halloween. 회사에서는 매년 파티를 열어서 스튜디오별로 호박도 조각하고 의상 경연대회 같은 것도 하는데 올해도 야근하느라 아무 것도 준비할 수가 없었다. 진짜 만성절인 오늘,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을 해보니 심지어 애들이 찾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사다놓았어야만 했을 법한 초콜렛도 안 사다 놓았다는… 간단하게 장도 볼 겸 수퍼마켓에 들렀으나 벌써 열시로 향해가는 이 시간대에 아이들이 집에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은 나한테 필요한 것들만 사가지고 퇴근하니 애들이 전부 Pied Piper라도 쫓아간 듯 동네는 조용했다. 옷도 채 갈아입지 않은채로 소파에 앉았는데 기분이 낯설었다. 내일은 여섯시에 일어나서 달리기를 하러 가야된다. 반쪽마라톤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현재까지의 최장거리는 12km에 불과하다. 내일 달리기를 완주하면 한 번에 4km를 늘리게 되는 셈이다. 스스로한테 고문이라도 가해야되는 시간이 찾아온걸까.

 by bluexmas | 2008/11/01 12:31 | Life | 트랙백 | 덧글(3)

 Commented by 1984 at 2008/11/01 13:40 

할로윈이라 역시 한국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낯선 명절이에요.

뿌듯한 하루 축하드리고, 푹 쉬시고 내일도 뿌듯하게 잘 달리시기를!

 Commented by 모조 at 2008/11/01 15:00  

완주하시기를!

(저는 차라리 하루종일 걸으라면 걷겠어요. ㅠㅠ)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1/03 05:30 

1984님: 여기에서도 명절까지는 아니고 그냥 하루 노는 정도인 것 같아요. 전 7,8년짼데 뭘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네요. 축하까지 해주시니 황송하고, 어제 달리기는 덕분에 잘 마쳤답니다.

모조님: 바로 글 올렸던 것처럼 완주했어요. 저도 걷는 것 좋아해요. 제가 사는 동네도 걷기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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