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병신 점검 목록

 어떻게 세뇌를 받았는지 건축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위대한 학문/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면허를 따면 건축’사’ 가 되므로 의’사’나 변호’사’ 와 사회적으로 같은 지위에 속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 자체로는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자기 직업 좋다고 생각한는데 뭐가 문제랴… 그러나 자기를 잘났다고 생각하려면 남들을 무시해야 되는 법, 나머지 직업은 직업도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문제가 벌어지게 된다. 학교에서 역시 다른 과 학생들은 다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생각한다.

2. 자신이 일에 미쳤다고 생각한다. 일이 취미이고 자기는 건축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취미라는 걸 가진 사람들을 경멸한다는 것이다.

3. 2와는 정반대로 학교에서 요구하는 대로 이것저것 하다보니 잡다하게 건드려본게 너무 많아지고, 결국 자신이 모든 걸 다 잘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쪽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포토샵과 캐드는 기본이고 무슨 동영상 만드는 프로그램에 웹 디자인 등등… 이렇게 여러가지를 건드리다 보면 자신이 전지전능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게 과외활동과 맞물리면 증세는 한층 더 심각해진다. 악기, 음식, 시사토론 등등 세상살이에 필요하거나 필요하지 않거나 거의 모든 것들에 한 번씩 발을 담궈본다. 그러나 현실은 그 모든 걸 단지 건드려보았을 뿐, 깊게 들어간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잘하는 건 하나도 없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건축도 못한다.

4. 언제나 건축에 관련된 얘기만을 한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끼리라면 모르겠으나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도 거의 강제주입하다시피 건축에 관련된 얘기만을 한다. 학생때는 소개팅이나 미팅자리에서 만난 상대방에게 1에서 처럼 건축이 얼마나 좋은 직업인지 읊어대거나, 서울이라는 도시가 전문가적인 시각에서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를 상식적으로도 충분히 설명가능한데 굳이 도시맥락적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바득바득 쓴다. 직업인이 되어서는 관심없는 상대방에게 카페 인테리어에 들어갔음직한 걸레받이 단면 상세를 냅킨에 그려서 보여준다(그러나 대개 실제 시공된 것과는 맞지 않는다).

5. 4에서 만난 상대들이 대부분 지겹고 짜증나서 한 번 이상 만나지 못하는데, 어쩌다가 속아 코를 꿰어서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돈 제대로 못 벌어온다고 맨날 구박받는다. 그래도 건축해서 쿯하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배우자에게는 그렇다고 얘기 안 하고 그냥 굽신거린다.

6.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면 꼭 누가 아무도 모르는 건축가 이름을 많이 읊을 수 있나 경쟁한다. 벌써 생업에 찌들어 건축가 따위에 관심이 없는 상황이라면 누가 더 말도 안 되는 현장에 많이 나가서 뒤치닥거리를 했나 그 무용담을 늘어놓는데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꼭 얼굴 붉히고 싸운다.

7. 6과 같은 상황이 벌여져도 아무도 남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인신공격을 하다가 꼭 얼굴 붏히고 싸운다.

8. 7과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다들 직업이 그래서 그런지 쪼잔해져서 화해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누가 회사라도 옮기면 영원히 남남이 된다.

9. ‘컨셉’ 타령을 한다. 영어에 Concept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약하게 발음되는 꼬리의 t일랑은 아예 묵음이 있는 불어처럼 떼어버리고 ‘컨셉’ 이라고 쿨하게 발음한다. 그 어떤 곳에다가도 컨셉이라는 단어를 남발한다. 말하자면 컨셉 타령을 쓰는데에 컨셉이라는게 아예 없다. 그냥 가져다가 붙이면 된다. 이와 비슷한 말로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이 쓰는 ‘꼼뻬’ 라는 말이 있다. 이건 ‘현상설계’나 ‘설계경기’를 일컫는 ‘Competition’이 멋대로 반토막쳐져서 불어발음화의 수모를 당한 뒤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컴페티션’ 도 아니고 ‘꼼뻬띠시옹’ 도 아니다. 그냥 ‘꼼뻬’ 다.

10. 9처럼 말해서 아무도 못 알아들으면 그게 건축해서 쿨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 전에 상식이라는게 있다는 생각을 못할만큼 세뇌된 것이다.

11. 개념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끄집어내자면 ‘비움으로써 채움’ 이라는 말을 남발한다. 말하자면 자기 건축 세계를 ‘비움으로써 채움’ 으로 채워버린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배워야 채움을 이룰 수 있는지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일단 말만 남용한다. 아니면 생각해도 답을 얻을 수가 없다. 결국 비움으로써 완전히 비워져서 공허하거나 너무 채워서 터져버린다. 그러나 본인은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도 모른다.

12. 말도 안 되는 구어체를 쓴다. ‘-적’ 만 명사에다가 대충 붙이면 다 형용사가 되는 줄 안다. 이건 1950년대에 번역된 책으로 공부를 한 탓이다. 아니면 아예 어려운 책이라고는 읽어본 적이 없는데 대학원가서 일 년에 한 권 읽기도 어려운 원서를 대학원생들이 찢어 막 번역한 교재 아닌 그 무엇인가로 세미나를 한 탓에 생기는 현상이다. 나중에는 결국 언어가 파괴되어 구어와 문어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13. 12처럼 되어도 자기가 건축해서 쿨한 것으로 착각한다.

14. 건축이론을 공부하려면 근원을 알아야 된다며 온갖 철학책들을 읽어보지만 실제로 이해는 못하면서도 주워섬길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한다. 이 경우 100% 궤변론자로 허물 벗어 새로 태어난다. 고로 논쟁금지.

15. 13과 14가 한데 합쳐져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 논리의 돌연변이가 된다. 절대 건드리면 안된다. 논리체계라는게 완전 파괴되어 자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확률이 높다.

16. 자기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가 될 것이라고 꿈에 부풀어 있다.

17. 그러나 회사에서도 그림만 그리지 실제 건축은 못 하다가 아예 일러스트레이터가 된다.

18. 오래 한 장소에서 뭉갤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설계실에서 매일 밤 새우고, 회사에서는 매일 야근한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밤 새워 스타크래프트를 하거나 회사에서는 한 시간에 할 일을 두 시간에 늘려서 하는 것이 현실이다. 잠을 못자 얼굴이 누렇게 뜬 만큼의 실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19. 백만명에 한 명꼴로 어울린다는 나비넥타이를 즐겨 맨다.

20. 이런 목록 같은 걸 작성하는 본인같은 인간을 직업계의 패륜아로 묘사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자가진단, 주석 및 해설은 다음 시간에?

 by bluexmas | 2008/10/30 14:14 | Architecture | 트랙백 | 덧글(9)

 Commented by zizi at 2008/10/30 14:34 

… 헉, 진짠가요? (특히 나비넥타이에 놀라움을 금치못하며;)

업계마다 이런 거 만들어보면 꽤나 그럴듯한 것들이 만들어질 것도 같네요. 드라마에는 안나오는 업계의 진실..

 Commented at 2008/10/30 17:2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무명 at 2008/10/31 09:53  

훈훈한 글도 써주세요. ^___^

 Commented by j at 2008/10/31 10:25  

쭉 읽어가다가 19에서 bluxmas님만의 유머에 웃었습니다^^

이런걸 적재적소에 쓰인 유머라고하는것 같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0/31 14:23 

zizi님: 뭐 진짜도 있고 과장도 있고 그렇죠. 제가 써대는게 다 그렇듯이요^^

드라마에 나오는 건축 관련 얘기에 저는 콧방귀도 안 뀐답니다, 하하…

비공개님: 여기에 제가 해당하는 사항이 반이 넘을까요 안 넘을까요? 하하… 저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답니다. 그러니까 이런거 쓰죠^^ 너무 걱정마세요.

무명님: 훈훈한 일이 없는데 만드는데 도움 주시면 너무 훈훈해서 짜증나는 글 쓸께요 ^____^

j님: 나비넥타이는 완전히 구라는 아니랍니다, 특히 미국에서는요..

 Commented at 2008/11/13 13:4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1/14 13:03 

네, 거짓말 아니에요-_-;;; 이 바닥에 egocentric한 사람들 너무 많거든요. 저도 뭐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 대하다 보면 괴로운 경우가 많죠. 무식하게 egocentric해서.

미술하시는 것 같던데, 건축 공부하고 싶으세요?

 Commented by  at 2010/11/15 21:59 

안녕하세요. 오래전의 포스팅에 이렇게 덧글을 남겨도 될런지 잘 모르겠는데.. 현 건축과 졸업생으로서 충분히 공감하고 갑니다. 참.. 어쩜 저는 호주에서 건축을 공부했는데도 한국의 현실과 너무나도 비슷한 점에- 특히 1,2,3,4 번은 완전 같아요. 학교에서 불행하게도 한 건물을 쓰는 인테리어 디자인과 학생들은 건축과 학생들에게 사람취급도 못 받는 일이 빈번했어요. 링크 추가하고 가요.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11/15 22:03

네, 물론 남기셔도 됩니다. 저는 미국에서 잠깐 있었습니다.

건축의 울타리 안에 불쌍한 사람들 많습니다… 미국에서 나온 책들을 읽어도 똑같습니다. 직업 전체의 환상일지도 모르죠 뭐.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