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그리고 잔인함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퇴근 후 코스트코에 여러달 별렀던, 갈비찜을 하면 끝내줄 것 같은 무쇠남비를 사러 가서는 계산을 마치고 막 매장을 나오는 길이었다. 몇 줄 건너 있는 계산대에 엄마가 쌍둥이 여자아이들(채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을 데리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막 밀쳐서 콘크리트 바닥에 정말 철퍼덕 엎어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장난의 수준이 아닌 과격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엎어진 아이는 곧 일어났지만 길게 기른 가운데 가르마로 가리워진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차 있음을 열 발자국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엄마로 짐작되는 여자는 밀친 아이에게 몇 마디 말 뿐, 몸을 움직여 제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이는 계속해서 다른 아이를 괴롭혔다. 밀고 목을 조르고 등을 할퀴고… 그러는 와중에 그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아이의 표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넘어졌을 때의 고통으로 금방이라도 엉엉 울어야만 할 것 같지만 무엇엔가 억눌린 듯 그 고통과 슬픔마저도 제대로 내보일 수 있는 종류의 표정이 아니었다. 아이는 주눅이 잔뜩 들어있었고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이런 상황을 만성적으로 겪어서 지칠대로 지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깊게 배인 체념이 아이의 감정 표현을 막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이러한 상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어쨌거나 괴롭힘은 끝없이 이어졌고 엄마로 짐작되는 여자의 몸짓과 말투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처음에는 출구를 향해 움직이면서 그 광경을 보았지만 괴롭히는 아이의 행동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잔인함에 소름이 끼쳐 그 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괴롭히는 아이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은 자기가 다른 아이에게 부여하는 물리적인 충격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불러일으키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말하는, 감정적인 백지상태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느낀 바로는, 그 아이에게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불러일으키는 고통이나, 그 고통의 감정적인 근원이 되는 잔인함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내가 그렇게 등에 소름이 좍 끼친채 가만히 서 있는 동안 두 아이를 데리고 엄마가 수레를 밀면서 지나가는데 “너 얘한테 사과했어?”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제서야 괴롭혔던 아이는 아직도 울고 싶지만 울 수 없는 표정의 자기 형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마도 계속해서 가해자였을테고, 단순한 말 한 마디짜리의 사과로는 그 어떤 것도 달라질 수 없을 것처럼 다른 아이의 상처는 깊어보였다. 나는 굉장히 마음이 씁쓸했다, 아이의 눈을 보았는데 그 그늘이라는게 그 나이 또래 아이의 것 같지가 않아보여서. 만약 내가 생각하는 상황이 현실이라면 10년 뒤에 두 아이의 삶은, 아니면 성격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라고 생각하니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일인데도 마음이 아프려고 했다. 어린 시절의 가족 안에서의 역학관계 dynamics, 특히 형제관계가 인간의 성격형성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경험해봐서 아는 나로써는 나중에 저 아이들을 다시 볼 일이 없을지라도 당하는 아이가 멀쩡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광경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잔인함의 원동력 또는 근원이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기가 가하는 고통에 대한 무지라고 생각했다. 그건 달리 말하면 아이의 엄마가 평소에도 그저 아이들의 장난이려니, 하는 나태한 생각으로 상황에 맞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왔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아이들의 잔인함이 고통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어른들의 잔인함이라는 것은 완전히 반대로 고통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함께 했다. 십 수년 전 군대에 있을 때,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하기를 맞은 놈이 짬밥을 먹고 나면 더 무섭게 때린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군에 ‘마지못해’ 몸 담고 있을때만 해도 맞고 때리는 그 영원의 지옥도에서 발을 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갓 스물을 넘긴 혈기 왕성한 아이들에게 절대권력이 주어진다는 걸 누가 상상해봤을까? 게다가 맞아본 애들은 그렇게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그 느낌을 잘 기억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기가 고통을 가할 대상은 거의 100% 반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한 신체적, 정신적 환경은 결국 자기가 어떠한 이유나 상황에서든 당했던 고통의 개인사를 빠르게 되감기로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복수에 대한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게 된다. 그러니까 애초에 정당할 수 없는 구타의 이유가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가해지는 구타의 강도는 단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인물이 빚어낸 순간적인 원인만을 순수하게 반영한 것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자기가 이등병이었을때, 병장 누군가에게 코푼 휴지 받아서 잽싸게 안 버렸다고 싸대기 맞았던 순간이 생각날 수도 있고, 아니면 초등학교 4학년때 맞벌이하셨던 엄마가 아주 오랫만에 일 쉬신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싸줬던 김밥을 반에서 제일 덩치 큰 애에게 뺏기기 싫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김밥도 자기도 교실바닥에 내팽게쳐졌었던 유년기 굴욕의 순간이 떠오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복수의 욕망에 한층 강화된 잔인함은 한층 불공정하게 증폭된 고통을 타인에게 투사한다. 그 순간엔 그가 당신의 Scapegoat 이며 Whipping Boy,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가 그랬다고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의식은 거짓말에 아주 좋은 도구로 쓰일 수 있으니까.

그냥 너무나도 뜬금없이 고통이며 잔인함과 같은 인간감정의 가장 그늘진 구석에 대해서 생각했다. 중고등학교때, 저 사람들 정말 정상인걸까, 라고 생각되는 선생들을 만만치 않게 봤었다. 정말 아주 사소한 잘못인데도 자기 분을 못 이겨 애를 죽기 전까지 주먹질하면 누군가도 있었고, 또 마대자루가 부러지지 않으면 체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누군가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와서 돌아보면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순수한 체벌의 동기에서 그 정도의 고통을 학생에게 가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걷지 못할 정도로 사람을 때렸다면 가해자는 적어도 누군가에게 그 비슷한 정도의 고통을 주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고통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에서 너무나도 먼 시간의 거리를 달려왔으니까. 그러나 삶에 기쁨이 생겨나듯 고통도 생겨나는 법… 가끔은 자기가 받은 고통을 그대로 삭히기도, 또 그 고통의 근원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지 않기도 힘들때가 있다. 나만 그런지도 모르지만, 잔인해지고 싶은 욕구가 불타오를 때가 종종 있으니까. 식욕이나 성욕이 경험의 이전보다는 이후에 육체적, 감정적으로 우월함이나 개선되었음을 느끼게 하는 행동으로 이꾸는 욕구라면, 잔인함에 대한 욕구, 남에게 복수를 안기고 싶고 또 고통을 주고 싶은 욕구라는 건 그 반대로 육체적, 감정적으로 열등함을, 악화되었음을 느끼게 하는 행동으로 사람을 이끄는 욕구니까. 그리고 그 대상도 내가 아니니까. 늑대가 아니어도 가끔은 피냄새를 맡고 싶은 감정의 밤이 찾아오니까.

 by bluexmas | 2008/10/24 13:26 | Life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at 2008/10/24 17:1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0/27 11:10 

항상 그런 감정을 잘 걸러내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살다보면 자신을 좀먹는 감정이 안 생기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거든요. 아직도 정확하게 어떤 방법들이 잘 듣는지는 잘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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