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라는 이름의 면죄부

방금 집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일했던 건 아니고, 열 시 반에 마치고 바에 들러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어느 날이든 저녁에 먹으려고 밥도 해놨고 국도 끓여놨고 심지어는 냉동실에서 절인 고등어도 한 토막 꺼내 놨는데 이번 주 내내 먹을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열 두시 넘어서 혼자 꾸역꾸역 밥 먹기도 좀 그렇고… 바는,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다. 그나마 얼굴 알고 지내던 애들도 다 그만뒀고 지금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연로하신데다가 붙임성이 없다. 이젠 안 올거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 혼자 이별주를 마셨다. 하필 다시 오겠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날에 언제나 이 시간이면 노래를 부르는 남자 T의 노래가 좋게 들렸다. 언제나 사람이 많다가도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다들 떠나는터라 난 농담으로 “쟤가 노래 시작하면 왔던 사람들도 다 가” 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오늘은 아예 노래를 부르기 전부터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그런지 에코랑 리버브를 적당히 섞은 목소리가 어제 비 온 뒤 제법 선선해진, 그러나 습기가 많은 바람을 타고 또렷하게 울려퍼졌다.

사실은 바에서 뭔가 먹을때까지 저녁을 먹지 못했다. 전체 팀의 2/3도 넘는 사람이 남아서 일을 하는데 윗사람들 누구도 어떻게 밥을 먹어야 되겠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많이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피자 한 쪽 정도는 먹을 생각이었다. 심지어 J한테 바로 앞의 글 아이폰으로 쓰고 들어가서 ‘우리 뭐 좀 먹어야 되는거 아냐’ 라고 말했는데도…나는 워낙 많이 안 먹으니까 제때에 밥을 먹어줘야 되고 그 이유 때문에 야근을 할 때면 먹을 걸 챙겨가지고 오는데, 결국 아무 것도 안 챙겨온 내 잘못인 듯. 사실 일 늦게까지 하는 건 필요하면 하는 거니까 그렇게 짜증나지는 않는데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배려가 없으면 나는 폭발하게 된다. 대부분 집에서 누가 밥 차려주면 먹고 안 차려주면 굶거나 대강 때우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밥을 먹는다는데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일 더 많이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닐텐데 왜 다들 밥마저 굶어가며 일을 하는 걸까. 사실 오늘은 더 짜증나는 일이 있어서 잠시나마 살의에 시달렸는데 그 얘기는 다시 입에 담기도 짜증나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하여간 이렇게 금요일의 야근이 길어지면 체육관이 닫기 이전에 일을 마쳐도 운동을 안 하게 된다. 그냥 금요일이니까, 라는 면죄부라고나 할까. 하루 종일 똑같은 도면의 PDF를 백 번 정도 만들고 나면 같은 트랙을 계속해서 몇 번이고 돌아야만 하는 달리기도 하고 싶지 않게 된다. 좀 효율적으로 일하면 안 될까… 물론 말단이 위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늘어놓는 철없는 푸념일 수 밖에 없지만 어쩔때 보면 너무 비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냥 주말에 일 안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야 되는건지 참…

 by bluexmas | 2008/10/11 13:27 | Lif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at 2008/10/11 14:5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나녹 at 2008/10/11 21:23 

야근인데 밥 안주는 겁니꺅! 진짜 피자 한 조각은 먹어야..

 Commented at 2008/10/11 23: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0/12 12:13 

비공개 1님: 반갑습니다. 아이디는 여기저기 다니다가 본 기억이 나요. 메이저 블로거는 아니지만 이 블로그도 이젠 좀 나이를 먹다보니 새로 덧글 남기는 분들이 차츰 줄어들고 있어서 비공개님 같은 분들이 오시면 굉장히 반갑더라구요(요즘은 새로 뿐만이 아니라 아예 답글이 줄어들고 있죠 T_T). 저는 정말 배고프거나 배부를때 일하는거 싫어해서 항상 조금씩 여러번 먹는 방법으로 배를 채우면서 일을 하는데, 금요일에 늦게까지 일하랴 싶어서 준비를 안 했더니 굉장히 배고프더라구요. 그러나 뭐 지나가면 잊혀지는거죠^^

종종 들러주실거죠?^^

나녹님: 밥 못 얻어먹었지 말입니다… 오는 길에 바에서 먹은거 영수증 고이 모셔왔어요. 회사에다가 돈 달라고 그러게요.

비공개 2님: 네, 그 말씀하신게 맞아요. ‘온라인에서조차 ##구나’ 비슷한 감정이죠. 말로 설명하기 어렵죠 잘못 말하면 완전 밴댕이로 몰릴 확률이 높아서 설명은 못 할 것 같지만…

저는 언제나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싫어해서 아웃사이더로 살아서 별로 불만은 없어요. 학교 다닐때도 시간 나면 그냥 서점 돌아다니고 그랬으니까요.

그러게, 가까이 있으면 커피랑 쿠키를 갖춰놓고 수다라도 떨면 좋았을텐데요. 오늘 라비올리를 만들었는데 이게 혼자 먹기는 좀 아깝게 만들어져서 안타깝더라구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는 옛 성인의 말씀처럼, 감정을 가지는 것까지 막을 필요는 없답니다. 가끔은 감정을 가지는 것조차도 안 될때가 있거든요. 저처럼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결국 감정은 생명인게, 사람의 존재라는게 결국은 감정이라고 믿으니까요.

보내드리는 걸 받으셨다니 기쁘더라구요. 어느 어느 동네에서는 과연 이거 갈까? 하는 의심이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비공개님께서 좋아하신 그 동네가 바로 그런 동네였거든요. 덕분에 며칠은 또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겠네요. 하하…

알고보면 빵은 뭔가 썩은게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답니다. sourdough는 밀가루랑 공기에 떠다니는 이스트를 썩여서 만든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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