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감기

어째 여행이 너무 순조로와서 여행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감기가 찾아온 것 같다. 역시 감기라는 건 쌀쌀한 날씨에 비를 맞고 난 다음 목부터 칼칼해지는 느낌으로 찾아와야 제맛이지, 그것도 아주 덜컥.

배에서 내려 방에 짐을 내려놓기까지의 서너시간 동안은 날씨도 좋고 보고 싶은 건물도 보고 아주 순조로왔는데,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밖엘 나가니 날씨가 많이 춥고 흐려져있었다. 가장 보고 싶은 건물들이 걸어서 좀 먼 거리에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반을 보고 일단 방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같은 길을 걸어 좀 멀리까지 가야만 했다. 헬싱키에서 올림픽을 1950년대, 그러니까 그렇게 오래 전에 한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그 올림픽 경기장에 있는 탑에 올라갔다 내려오니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한 30분을 걸어서 호텔 근처로 와서는 9일만에 처음으로 여기 단 하나 있다는 한국음식점에서 밥이라는 걸 먹고 다시 비를 더 맞고 돌아와 사진도 컴퓨터에 저장하고 기록도 해야되는데 그냥 쓰러져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는 감기, 나의 생각보다 별로 안 지친 육체에 왕림하시다. 내가 널 반가워할거라고 생각해, 아무리 2년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다고 해도?

이건 따로 쓰려다가 그냥 귀찮아서 같이 쓰는건데, 자는 내내 웃기는 꿈을 꾸었다. 나는 어디엔가를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이유로 가게 되었는데 그 장소에서 우연히 초등학교인지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게 열리고 있던 모양인지 누군가 나를 보더니 “야, 쟤 철수(가명) 아냐? 옛날에 백키로 나가던 앤데…”

웃기는 건 나는 걔들이 누군지 기억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에다가 나는 동창 모임 같은데에는 거의 절대 안 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마지못해 ‘거의’ 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대학교 새내기 시절 딱 한 번 고등학교 동문회라는데 갔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질려버려서 다음부터는 절대 안 나갔지…). 그래, 나 옛날에 백키로 나갔는데 어쩌라구. 그건 그렇고 나는 어쩌자고 저런 꿈을 잊을만하면 꾸게되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잊을만하면 꼭 한 번씩 저 따위의 꿈을 꾼다. 뭐 그렇게 맺힌게 많았나?

하여간, 오후 두 시 비행기로 오슬로로 향한다. 오슬로에서 묵을 장소에 인터넷이 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오늘은 밤에 밖에 안 나가고 이런저런 업데이트나 해야지, 라던 부푼 계획은 저 짜증나는 꿈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아침까지 조금 더 자야되는건지 아니면 뭐라도 써야되는건지, 가방이라도 미리 싸야되는건지 뭘 해야되는건지 머릿속이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게다가 배까지 고파지려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집 생각은 별로 나지 않는다. 저녁을, 음식 자체를 못마땅하게 먹은 건 아닌데 예상했던 것처럼 이런데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혼자 들어가 밥 먹는 것에 대한 그 뭔가 야릇한 사람들의 대접이 나를 불편하게 해서 집에 가면 두 번째 끼니로 오늘 먹은 것보다 백배는 맛있는 돼지 목살 고추장 구이 해서 먹어주지, 라는 생각을 했다. 생강 미친 듯이 갈아넣고… 참, 왜 두 번째 끼니냐면, 오후에 도착하는데 첫 번째 끼니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베트남 쌀국수로 때우려고… 집에 가자마자 가장 먼저 먹고 싶은 음식이 한국음식이 아니라니, 베트남에서 명예 시민권이라도 줘야되는거 아닌가.

 by bluexmas | 2008/09/07 08:46 | Life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by 1984 at 2008/09/07 09:50 

감기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대공감했어요, 다방 커피긴 하지만 홀짝 거리며 선선한 날씨를 즐기고 있어서 마음이 그렇네요. 그런데 북유럽에 감가라니 멋지지 않아요- 헤헤.

저도 여행다닐 때 가장 먹고 싶었던 게 우동이었어요. 그리고 정말 여행을 다녀와서 꼬박 세 달쯤 열심히 우동을 먹었던 기억이 나요.

노르웨이에서도 예쁜 사진 부탁드립니다-

 Commented by turtle at 2008/09/07 12:10 

이런~ 감기 얼른 나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아프다는 핑계로 적당히 하루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제 경우엔 아주 나쁘지 않더라고요. 그냥 느긋하게 숙소 주변을 살짝 산책하고, 오래오래 식사를 하고, 오래오래 낮잠을 자고…사실 이러는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9/08 08:36 

1984님: 뭐 고독마저도 감미롭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감기에는 별로 감미로운 기분이 안 드는데요? 노르웨이는 피요르드라도 가야 예쁜 경치가 나오고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카메라와 인력도 좋은 사진을 만들 것 같아요. 그나저나 쌀국수 생각이 간절하군요. 하하…

turtle님: 뭐 심한 건 아니랍니다. 그저 좀 거슬리는거죠. 저도 어쩌면 내일 뒹굴거려야 할지도 몰라요. 비가 많이 오거든요. 빨래해야 될 것 같은데…

 Commented by veryStevie at 2008/09/09 15:05 

이제는 좀 괜찮으세요? 아프지 마세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9/12 09:31 

사실은 요 며칠 상태가 안 좋은데 집에 가면 괜찮아질거에요. 걱정해주셔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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