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행복의 저녁

선배의 생일턱 겸 매주 금요일의 점심을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먹고 돌아오는데, 부는 바람의 느낌이 어째 저녁에는 스산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금요일에 퇴근하고 바에 들르지 않은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결석이다. 사람이 나 말고는 없다는 것을 빼놓고는, 오늘같이 습기 없는 바람이 부는 밤이면 내 집이 어느 술집보다도 훨씬 낫다. 물론 그, 사람이 없다는게 조금 치명적이긴 하지만… 일곱시까지 일을 하고 American Apparel에서 살게 있어 잠시 들렀는데 문을 닫아버린 것을 알고 망연자실… 일곱시 반도 안되었던 시간이니 일곱시에 닫는다는건데…음.

이왕 차를 몰고 간 김에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백화점에 들렀는데 올해는 남자도 카디건이 유행인건지 어떤건지 잘 가는 가게들마다 전부 색색의 카디건을 늘어놓고 있었다. 사실은 벌써 두 벌이나 샀는데… -_-;;; 어차피 이젠 정장을 입을 필요가 없으므로 가을/겨울에 입을 기본 면바지와 셔츠 위주의 차림을 생각하고 있어서 카디건은 꼭 필요한 종류이긴 하다.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30주년-지들이 그렇다니까 그런거지 나는 별로 관심 없다-을 맞아 조금은 야심차게 내어놓은 듯한 느낌의 모노그램 콜렉션은, 여자옷은 잘 들여다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남자 옷은 좋게 봐주면 버버리같은, 그리고 대강 봐주면 빈폴 옴므 같은 느낌이 났다(지난 겨울에 빈폴 옴므 니트 웃도리를 두 벌 사가지고 왔는데, 정말 좋더라. 맞기도 너무 잘 맞고…). 그러나 그 두 상표 모두보다는 조금 저렴하겠지. 검정이나 회색 같은, 내가 잘 안 입는 무채색을 바탕으로 전체 콜렉션을 꾸려 나가는 가운데 채도가 좀 높은 빨간색으로 내어놓은 스웨터나 카디건 등등이 있었는데, 얘들이 마음에 들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Varsity 풍인데 그 채도가 높은 빨간색이랄까… 사실 캐시미어는 $200-300 범위에서 사면 그렇게 좋은게 아니라고들 하는데 여자 옷은 몰라도 남자 옷의 경우에는 그 정도에서 살 수 있는 캐시미어는 제이크루가 제일 나은 것 같고(그래봐야 한 2년 열심히 입으면 보푸라기가 너무 많이 일어난다), 오늘 본 바나나 리퍼블릭 모노그램 콜렉션의 캐시미어도 그 가격대였는데 이게 어떤지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건 뭐 그렇게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는 것… 모든 상표들이 해가 거듭되면서 다들 조금씩 치수를 바꿔서 옷을 내어놓는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제이크루나 바나나 리퍼블릭의 small(175/75에 스몰을 입어야 한다니 이건 좀…-_-;;;)이나 medium이 잘 맞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미국물 먹을 만큼 먹어서 체형도? 일반적으로 나는 미국애들보다 팔이 짧고 목이 굵어서 옷이 잘 안 맞는 편이어왔는데, 올해는 정말 이상하다(2000년대 초반에 두산에서 폴로 라이센싱을 접고 미국 폴로를 직접 들여왔을때 옷이 안 맞는 걸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얘긴지 이해할 수 있을 듯). 게다가 요즘은 Gap의 옷이 너무 잘 맞는데… 요 얘기는 따로 써도 한참을 쓸 수 있는 거리가 있으므로 나중에 쓰기로 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홉시, 금요일 저녁을 집에서 먹는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또 밥도 없어서 벌써 늦어버린 저녁이었지만, 다른 걸 집어먹고 싶은 유혹을 애써 뿌리치고 새로 밥을 짓는다. 그러니까 나는 이게 한 주일동안 진빠진 나에게 그래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냉장고에서 미리 지어놓아서 공기에 담아 플라스틱 랩을 씌워놓은 밥이 아닌, 또 아침에 밥솥에 안쳐놓고 나간 밥도 아닌, 그 자리에서 쌀 씻어서 짓는 밥…. 일주일에 한 두번도 이렇게 밥 못 해먹을거면 왜 살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어차피 밥이 될 동안 시간이 있으므로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 그 전에 저녁에 마실 포도주를 한 병 미리 따 놓는다. 며칠 전에 보드카 대신 마셔보려고 데킬라를 사러 갔다가 충동구매한 $10짜리 피노 누와. 뭔가 싸게 나온 녀석들이 있다면 보통은 세 병 정도를 산다. 일단 그냥 마셔보고, 또 음식을 만들어서 먹어보고, 마지막 한 병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마시기 위해서… 하여간 집을 나서서 달린다. 벌써 밖은 깜깜하다. 그래서 도로로 나갈 수 없으므로 내가 사는 단지와 옆단지를 계속해서 돈다, 5마일을 채울때까지. 서늘해서 그런지 뛰는게 하나도 버겁지 않다. 달리기를 마치면 그제서야 한 주가 마무리된다. 집에 돌아와 열 시가 넘은 시간에 저녁을 먹는다. 뭐 별 반찬은 없지만 그래도 밖에서 먹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다. 국이라도 끓였어야 되는데, 그건 차마 버거워서 할 수가 없었다. 포도주를 마신다. 지지난주엔가 코스트코에서 채 $10도 안 하는 피노 누와, 그러니까 내가 맨날 가짜라고 생각하는, 미국을 겨냥한 프랑스 싸구려 피노 누와를 사다 마시고는 그 맛에 깜짝 놀라 마시지도 않고 편견을 가진 나를 꾸짖은 적이 있었는데, 이건 그거보다 조금 못한 느낌이다(이 글 쓰면서도 계속 마시고 있다…). 알고보니 그 $8짜리 초 싸구려 피노 누와는 매체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은 녀석이라고… 오랫만에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포도주를 홀짝거리는데, 그 스산하게 부는 사람때문에 집 뒷마당에 심겨진 나무들의 이파리가 쓸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9월 중순 이후부터 11월까지, 저 바람소리는 매일 저녁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예고편을 보는 기분이었다. 지금 마시는 싸구려 피노 누와 말고도 그럭저럭 마실만한 론 한 병이 있고, 또 너무 싸게 파는 가격에 현혹되어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품종인데도 세 병이나 집어들고 온 이탈리아 출신도 한 세 병인가 있다. 이런 금요일 저녁에 행복해지려면 이런 스산한 느낌과 바람 및 나뭇잎 소리와 $10 안쪽의 싸구려 와인 정도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어째 바랬던 기억이 희미하다. 그래서 벌써 6개월 전에 생일에 마시려고 $40짜리 프랑스산을 한 병 샀다가 아직도 마시지 못하고 있다. 나 혼자 마실 동기도 없고, 마시면 행복함에 유체이탈이라도 할 것 같아서… 스산한 행복이라니, 어째 형용사와 명사가 제대로 짝을 이루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나만 행복하면 되니까 가볍게 무시한다. 그러고보니 나는 누군가의 글에서도 언급되었던 공대출신인데, 그런 공대 출신이 국어의 품사를 논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돌연변이인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차피 그런 유치한 분류법과 나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학 교육이 나를 만든 건 아니니까, 라고 생각하고 병을 비운다. 빈 병임을 알아차리고 나니 행복이 슬픔으로 껍데기를 갈아입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직도 바람은 스산하고 또 서늘하다. 바람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2층의 컴퓨터방에서 이렇게 뭔가를 끄적거리면서도 청량한 기분을 느끼면서 아주 오랫만에 금요일 저녁이 금요일 저녁 답다는 생각을 하며 순간을 즐긴다, 사람 없이도. 같이 즐기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래며 마지막 잔을 권한다. 기억을 돌아보니 오늘이 이 집으로 혼자 덩그러니 이사와서 보내는 아흔 몇 번째 금요일인 것 같다.

 by bluexmas | 2008/08/23 13:24 | Life | 트랙백 | 덧글(8)

 Commented by Eiren at 2008/08/23 13:46 

좋을 때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지만, 더운 여름에는 서늘한 밤만으로도 행복해진다는 게 참 신기하지요. 이 곳은 다시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는데, 곧 8월이 끝난다는 희망만으로 살고 있어요.

바나나 리퍼블릭이나, 제이크루, 갭을 자주 가시는군요. 저도 가끔 이 곳에서 옷을 입어볼 때는 셔츠 소매가 길어서 슬퍼요. 빈폴 옷 좋지요. 가격만 좀 착하다면 더 좋을텐데요^^;;;

 Commented at 2008/08/23 14:1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8/23 20:0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8/24 00: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turtle at 2008/08/24 01:40 

스산한 행복 좋은 말인데요? 어차피 어떤 형용사와 명사가 어울리는데 품사는 관계 없지 않나요.

그러나 저러나 그 동네엔 가을이 벌써 온 것 같아서 부러워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8/25 11:09 

Eiren님: 빈폴은 사실 디자인이 이젠 너무 좀…가격은 정말 너무 어렵죠-_-;;; 사실 위에서 말한 상표들이 아니면 입을만한 옷이 없어요. 가끔 폴로가 할인하면 집어오긴 하는데 잘 맞지도 않고…

비공개 1님: 사실 전 이렇게 꽤나 오래 살았고, 어릴때도 부모님이 일하시느라 거의 집에 안 계셨던터라 다른 사람들보다 그런 감정이 덜한건 아닐까… 라고 생각은 해요. 운동은 뭐 워낙 오랫동안 한터라 그냥 생활처럼 하는 거구요. 전 그런데 비공개님 블로그에서 글을 읽으니 나이도 어린데 객지 생활을 혼자서 오래하셨던 것 같아서 제가 마음이 좀 그렇더라구요.

하여간 여러가지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공개 2님: 그…왕십리에 있는 학교가 있어요. 사람들은 다 한양대라고 알고 있는데 저는 그 한양대의 분교 왕십리대를 졸업했죠. 가건물에서 수업듣고 스튜디오에서 설계 못하면 교수가 재떨이 던지고 채찍으로 때리고 뭐 그런… 저의 즐거움이 다른 사람의 괴로움이 될까봐 조금 신경이 쓰였더랬죠^^

비공개 3님: Theory는 생각 못 해봤는데, 그러고보니 느낌이 비슷한 것도 같네요. 물론 theory가 조금 더 미니멀하지 않나요? 솔직히 비싼데다 별로 좋은줄 몰라서 한 번도 시도는 안 해봤어요.

참… 저도 보라색 좋아하는데. 매년 나오는 제이크루의 캐시미어 스웨터 보라색(자주색일지도… dark eggplant라고 하죠)을 좋아하거든요. 올해는 카디건이 잘 나온 것 같은데 좀 비싸서…

turtle님: 저 형용사와 명사 얘기를 쓴 건 사실 언젠가 올라온 글을 비꼬는 의미였어요…. 주말에만 잠깐 이렇지 3주는 더 여름이 계속될거에요, 여기는… 상하이 많이 덥지 않나요? 여러모로 힘들게 지내실 듯.

비공개 4님: 그 피노누와, 다음엔 꼭 시도해보세요. 정말 편견을 가진 제가 한심스럽다고 생각되던데요? 틴 루프도 괜찮았는데 지난번에 산 칠레산 카버네는 별로였어요. $10인데 캔에 포장되어서 거기에 넘어가 샀는데…

 Commented by 샤인 at 2008/08/26 04:10 

그러게요. 스산한행복, 저도 어떤 느낌인지 알거같아요. 찬바람이 신선하게 느껴지기도하고.. 뭔가 로맨틱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말이죠.

근데 미국에서 살면서 체형바뀌는거.. 정말 사실인것같아요.

저도 미국와서 워낙 살이 찐것도 있긴하지만;; 여기애들 체형이랑 비슷해지는 느낌이랄까. 한국에있을때랑 많이 달라지는거같아요. 근데 옷을 다 여기사람들 기준에서 사다보니 이젠 한국갈때 입을옷을 따로 사야될거같다는;; 여기서입는옷들 한국에서 입으면 사람들이 ‘저 처자는 미쳤군~’ 하고 쳐다볼듯.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8/27 13:51 

로맨틱은, 아쉽게도 저에겐 해당사항이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요…

정말 체형 바뀌는 것 같아요. 물론 지난 몇 년간 운동을 해서 체형이 아주 조금 변했다는 건 느끼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 글쎄 요즘은 우리나라도 예전과 많이 다르지 않나요? 여기 스타일이 요즘은 더 좋은 느낌이던데. 이제 좀 살아서 그런걸까요?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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