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Knight (2008)- 아우라의 액션 > 몸의 액션

5월말, 뉴욕 여행을 가서 마지막 밤에 할 일 없이 길을 걷다가 조용해보이는 바에 들어가 포도주를 마시면서 일하는 사람들과 한참 수다를 떨었다. 마침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스타워즈 옛날 3부작의 마지막 편, 마지막 장면을 일하는 남자애와 같이 보는데 그는 마지막에 나오는 요다와 오비원 케노비, 그리고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영혼 가운데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그것이 헤이든 크리스찬센으로 바뀐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걸 빌미 삼아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는데, 그는 7월에 개봉한다는 Dark Knight을 무척이나 기다린다고 했었다. 예전 배트맨 영화 시리즈가 웃긴 구석도 많고 나름 괜찮았지만, 원작(나는 잘 안 봐서 모르겠다)에서의 어두운 면을 이번 영화가 제대로 살려줄 것 같다고, 자기는 그런 점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지난 토요일까지, 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 영화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렇게 나누었던 모르는 사람과의 뜬금없는 대화와 더불어 내가 영화를 개봉하고 또 보고 극장을 나설때까지 계속해서 가졌던 궁금증은, 과연 히스 레져의 죽음이 이 영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죽고 나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의 여운이 많이 남은 탓에 오히려 죽음에 관련된 기사를 의도적으로 접하지 않으려했지만, 그가 이 영화에서의 조커 역을 맡아 연습, 연기하고 난 다음 감정적인 부담을 덜어내지 못했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들었고, 그 얘기는 영화를 볼 때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과연 이 영화는 원래 별 볼일 없거나 그저그런 영화인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뻥튀겨진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그렇거나 아니거나 극장에 돈 바치고 영화를 볼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답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 영화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정말 훌륭하다. 물론, 그가 죽어서 안타깝지만, 그건 무엇보다도 그가 이 조커역을 다시 맡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어린 딸이 있다, 와 같은 사생활에 대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사실 제목 ‘배트맨’ 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은 것과는 별 상관이 없겠지만, 이 영화는 정말이지 배트맨보다는 조커를 위한 영화같다.

이 영화에서 조커라는 존재는 절대악과 같은 느낌을 준다. 내가 감히 ‘절대악’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그의 악행이 수단이 아니라 단지 목적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의 시작이 그의 은행강도질이지만, 그가 진정 돈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른다는 생각을 하기는 영화 전체를 보았을 때 그렇게 쉽지 않다. 그는 단지 순수한 악의 구현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그가 거짓으로나마 동맹을 맺는 척하는 고담시의 갱들과 그를 갈라놓는다. 게다가 그에게는 연결고리도 없고 신원조차 파악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악의 구현을 위한 방법이 너무나 당연하게 잔인하면서도 또 놀랍도록 지능적이다. 그가 활개를 치는 장면이면 고담시 전체가 그가 지닌 악의 구현의지로 빚어진 철장에 빼곡히 들어찬 갸날픈 새처럼 보이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리고 배트맨은 그런 조커에게 영화 내내 시달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초영웅물의 결론답게 그를 잡지만 그것마저도 그렇게 뒷맛이 개운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 이 영화에선 선이 아주 개운하게 악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아무도 보여주지 못하고, 그건 감독의 설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영화 내내 선역으로는 배트맨보다 더 호쾌한 모습을 보여주는 하비 덴트가 사랑하는 여자와 얼굴 반쪽을 잃은 뒤 투 페이스로서 보여주는 모습은 조커가 가장 잔인할때보다 더 섬뜩하다(그런 점에서 아론 에카트의 연기는 히스 레져 다음, 아니 거의 맞먹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렇게 개운함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설정이 감독의 의도였다는 전제하에, 이 영화는 너무나도 손쉽게 전형적인 초영웅물의 껍데기를 벗고 하나의 ‘영화’ 로써 자리잡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이 영화는 너무나도 모호하다.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영웅물에서 당연히 보여줘야만 할 것 같은 ‘악을 짓누르는 선’의 모습이 너무나도 희미한 느낌이다. 선은 악을 압도하지 못한다. 조커조차도 절대 망가뜨릴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 내린 배트맨은 결국 승리를 거두지만 그 승리는 너무나도 힘겹고 또 개운하지 못하며, 자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남는 건 애꿎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쫓기는 신세일 뿐이다. 액션영화? 극장문을 나서면서, 나는 생각보다 나 자신이 이 영화속에서의 액션에 감흥을 느끼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액션 아니고도 이 영화에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놀랍도록 탄탄하게 짜인 이야기의 얼개가 두 시간 반이 거의 지루하지 않게 느껴질만큼 가득 들어차있다(그러나 지루한 순간은 있다! 아무래도 두 시간 반은 조금 긴 듯…).그러나 굳이 이 영화에 액션 영화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다면, 몸의 액션이 아닌 아우라의 액션영화라고 붙여보면 어떨까, 라는 억지같은 생각을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떨고 있었다. 반은 조커가 무서워서, 그리고 나머지 반은 히스 레져의 죽음이 다시 한 번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주연아닌 주연, 배트맨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by bluexmas | 2008/07/23 13:01 | Movie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by nabiko at 2008/07/23 13:50 

지못미 크리스쳔 베일~이려나요?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Commented at 2008/07/23 15: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7/24 13:48 

nabiko님: 오랫만에 덧글 남겨주시는 것 같은데 잘 지내셨어요? ^^ 개인적으로는 절대 돈 안 아까운 올해의 영화라고 생각해요. 배트맨보다는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크리스찬 베일이 저는 더 마음에 들더라구요. 그런데 ‘지못미’는 무슨 뜻인가요? 타향생활이 길어지다보니…

비공개님: 전 개봉영화는 늘 그 주 토요일에 본답니다. 추가로 주말에 한 편씩 디비디 빌려서 보구요. 글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하비 덴트가 두 페이스가 되는 그 과정, 저 역시 굉장히 착잡한 마음으로 보았어요. 아론 에카트는 원래도 좋아했던 배운데, 연기를 너무 잘 한다고 생각하구요, 투 페이스가 된 이후로 어둠 속에서는 멀쩡한 반쪽 얼굴만 비추는 설정도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개리 올드맨의 꼬맹이 아들이 로빈이 된다는 설정도 훌륭한데요? 저는 아무런 생각을 안 했거든요, 영화 보고 질려서… 미국에서는 예고편에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인 새 터미네이터의 예고편이 나왔는데 너무 기대가 되더라구요.

 Commented by basic at 2008/07/25 01:50 

음. 원래 영웅물을 좋아하지 않고 배트맨은 그중에서도 가장 안 좋아하지만. 이번 영화는 꼭 보고 싶어요. 히스 레저가 정말 멋진 배우잖아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7/25 13:24 

히스레져가 스케이트 타는 아이로 나오는 영화 아세요? 제목에 dogtown이 들어가던데… 어째 그것도 한 번 빌려봐야 될 것 같아요.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