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고 싶은 새벽

그냥 배가 고프니까 먹는 수준에 불과했던 저녁을 대충 먹고 소파에 누워 있는데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온 집안이 어둠에 휩싸이더라구요. 또 정전이라니, 무슨 두메산골도 아니고 소들이 맷돌 돌려서 발전하는 것도 아닐텐데 이 동네는 정말 너무 정전이 잦은 것 같아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쯤은 집에 돌아와보면 전자렌지며 침대 머리맡의 알람 시계 등등이 88:88 내지는 12:00의 넋 나간 표정을 하고 앉아있기 일쑤니까요. 그런 일이 있을때마다 꼭 필요한 시계만 맞추기 때문에, 집에서 시간이 맞는 녀석이라고는 침대 맡의 라디오 시계 뿐이라죠. 네, 전자렌지 삐진지 꽤 오래됐죠… 표정이 석달째 88:88인데 아직도 맞춰주질 않았거든요. 맞춰도 소용 없어요. 다음 주 수요일 쯤이면 또 낮에 정전될테니까. 다른 건 걱정 안 하지만 은근히 예민한 DLP 텔레비젼은 언제나 애물단지일 수 밖에 없어요. 올해 초에 뇌와 심장을 통째로 바꿔줬지만 아직도 새 장기에 거부 반응이 있는지 아주 가끔 작동을 거부하니까요.

하여간, 오늘은 전화를 한 번쯤 해 봐야 되는걸까? 라는 생각을 하루 종일 너무 지루한 일을 하는 가운데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전화도 VoIP라서 신호가 안 가더라구요. 아, 그렇다면 이게 오늘은 전화하지 말라는 메시지인걸까, 라는 한심한 생각을 하고 저 역시 스위치를 내리고 잠에 빠져 들었지요. 그리고는 깨어보니 새벽 한 시… 오늘은 야구 중계를 놓친걸까, 라는 아쉬운 마음으로 텔레비젼을 켰는데, 다 이기던 경기를 9회에 말아먹어서 연장승부중이었고, 결국 지금 이 시간까지 야구를 보고 앉아있었죠. 그래도 이겼으니까 다행이에요.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유치한 습관들 가운데 하나는 야구 경기의 승패에 따라서 기분이 달라지는 것인데 요즘 승수를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고도 계속 놓치고 있어서 심기가 좀 불편했거든요. 요즘은 정말이지 그 어떤 것에도 별 요동이 없는 편인데 아직도 야구에 목숨을 걸고 있다니 때로는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긴 해요. 그러나 때로는 뭐 그런 것도 필요하겠죠. 인정하기 싫어도 가끔은 삶이 지루하잖아요.

갈매기들이 벌써 하얗게 떼를 지어 모여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구장 모습을 텔레비젼에서 보고 있노라니 아, 저기 있었으면 좋겠다,지금쯤은 밤공기가 제법 쌀쌀할텐데… 집이든 어디든 돌아가는 길에 그때 술 마셨던 거기에 다시 들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잠깐 들더라구요. 그리고는 쓰레기를 내 놓으러 집 밖에 나섰는데 이 동네의 공기도 꽤나 쌀쌀하게 느껴져서 어딘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이 늦은 새벽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서 봤자 불빛이라고는 24시간 여는 주유소의 그것 밖에 없는 아주 어두컴컴한 들판 한 가운데를 달리는 수 밖에 없을거니까, 괜히 움직일 필요가 없어요. 집을 떠나봤자 내가 혼자 있구나, 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재인식 할 뿐이니까, 저는 오늘밤도 그냥 여기에 머무를 생각이에요. 지금의 익숙함을 버리고 얻는 낯설음은 손에 쥐는 순간 외로움으로 변해버릴테니 굳이 바꾸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구요.

그렇지만, 오늘 밤은 그냥 깨어 있는 채로 보내면 안될까요? 언제나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나 주변에 많다고 투덜거리곤 했지만, 바깥 공기가 이렇게 쌀쌀하다고 느낄만큼 서늘한 것을 알아차리고 나니 그냥 삶의 관성이 저를 이끄는 대로 침대에 몸을 눕히기가 너무 억울하다고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햇살이 뜨거운 낮시간보다 지금 이 시간 저의 의식이 더 또렷한데도 무리의 한 가운데에 있어야만 하는 저에게는 별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배가 꽤 고파졌는데 대체 언제 사다 놓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 짜파게티를 끓여먹고 다시 소파에 누워 한 달이 넘도록 끝내지 못하고 있는 책을 읽으면 어떨까요… 그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다시 해가 뜰테니, 그때쯤 주섬주섬 일어나 모든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린 다음에 싸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에어콘을 틀은 다음에 내일의 밤이 다시 찾아올때까지 잠들면, 안될까요?

 by bluexmas | 2007/07/25 16:18 |  | 트랙백 | 덧글(11)

 Commented by 플라멩코핑크 at 2007/07/25 20:22 

예전엔 집안이 정전되면 좋은게 뭐였냐면요

숙제를 안해도 된다는 거랑…이히 그리고

세상이 너무 조용해져서 왠지 차분해지는 느낌.

게다가 켜 놓은 촛불 불빛만 바라봐도 마냥 좋았는데 말예요^_^

요즘은 확실히 정전될 일이 거의 없네요. 아니 아예 없는 듯.

 Commented at 2007/07/25 21:0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7/25 23:0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笑兒 at 2007/07/26 03:07 

가끔, 그럴때가 있어요..

밤에 차분해지고, 감상에 젖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잠들기에 너무 아까울때가..

히힛. 아직까지는 밤을 새고, 아침에 자도 되는 백수-_-인 것이

이럴땐, 복인 것 같아요.

 Commented at 2007/07/26 13: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7/26 14:2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7/26 14:30 

핑크님: 자기 집을 가져서 좋을 것 같지만, 너무 다닥다닥 붙여 지어서 옆집 에어콘 돌아가는 소리도 다 들리거든요. 정전되면 그 소리마저 잠잠해져서 좋은데 매미는 전기가 필요 없는 놈들이라서…

비공개 1님: 술이 최곤데 요즘은 마시고 다음날 아침에 교통체증을 뚫고 운전할 자신이 없어서요…-_-;;;

비공개 2님: 애독자 상을 드려야 할지, 아니면 졸필에 부끄러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笑兒님: 즐기세요, 순간을…

비공개 3님: 어리다고 하기엔 나이 좀 먹은 것 같은데요…흑흑…

비공개 4님: 그럼 아무거나 추천해주고 싶은 걸로 보내주셔도 좋아요!

 Commented at 2007/07/26 15:1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7/26 22:4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2/12 19:1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2/13 12:00 

그…그러셨군요. 대작을 해야죠. 각자 혼자 마시지 말고.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