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맛 위스키

본의 아니게 대장님과 야근 경쟁을 했습니다. 보통 다섯시 전에는 퇴근하시는 대장님께서, 오늘은 웬일로 여덟시가 넘어도 자리를 지키시더라구요. 저의 원래 계획은 여덟시 전에는 퇴근해서 그동안 이 뽑는다고 엄살부리느라 게을리한 운동을 제대로 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다들 퇴근하고 저랑 대장님만 남고 나니 갑자기 쓸데없는 오기가 발동해서, ‘이왕 저녁도 먹은 김에 대장님보다는 늦게 가야 되겠다’ 라는 마음만 먹고 계속 헐렁하게 일을 했습니다. 아 근데, 이 양반이 열 시 반까지 계시더라구요…제가 이 팀에 합류한지 일 년이 넘도록 아홉시 넘어서 퇴근하는 걸 본 적이 없었던터라,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여간 그 양반 퇴근하시고, 저도 예의상 주섬주섬 챙겨 열 한시 경에 회사를 나섰습니다. 제가 워낙 기회주의자인데다가 아부를 좋아하는 인간인데, 직장 생활 오래하신 분들께서 생각하시기에, 이러면 점수좀 딸까요? -_-;;; 요즘 워낙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데다가 어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세금고지서가 날아 들어와서 아무래도 연말에 보너스 좀 잘 받아야 될 것 같거든요. 조직생활 잘 하려면 싫은 것도 전혀 싫은티 안 내고 좋아하고, 일은 10분 하고 나머지 50분은 엔론 사태, 세계 제 2차 대전, 지난 주에 본 영화, 길 건너 새로 생긴 햄버거집의 맛 더럽게 없는 양파 튀김 이딴 것들에 대해 잡담만 죽어라 늘어 놓아도 ‘Yeah, that sounds great!’ 을 숨이 턱에 찰 때까지 외쳐대며 맞장구를 쳐 줘야 예쁨도 받고 그러는건데, 저는 그런 얘기가 10분 이상 길어지면 너무나 듣기 괴로운 나머지 그냥 화장실로 도망쳐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저같은 인간이 조직에서 사랑을 받기란 글러 먹은 것이겠죠. 네,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그저 성격이 원만하지 못한게 원죄인거죠 뭐. 저는 정말 이 나이 먹도록 ‘원만한 성격’ 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알아 먹지를 못했다니까요. 다들 저보다 목소리도 크고 참을성도 적은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저보다 성격이 원만하다고 하니까요. 네, 다수의 의견이니까 제가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요. 성격 원만하지 못한 제가 원만해지려면 그 정도 산고는 겪어야 이 사회에서 진짜 필요한 인간으로 껍질을 깨고 거듭나는 것일테니까요. 그런다고 월급 더 받을지는 아직도 확신이 안 서지만…

하여간 그렇게 야근을 학교 체육관 닫을 시간까지 하느라, 오늘도 운동을 해서 하루 종일 에어콘 바람에 뻣뻣하게 말렸던 몸을 풀어주지 못할 것 같아서, 회사 찬장을 뒤져보니 술 몇 종류가 있길래, 그 가운데 맛 없어 보이는 다크 럼과 제가 즐겨 마시는 것보다 싸구려인 보드카를 빼고 아이리시 위스키처럼 보이는 술을 아침에 커피 살 때 쓰는 보온 병에 담아 가지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하필이면 왜 술이냐…라고 궁금해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간단하게 굳어진 몸을 느슨하게 만드는데는, 운동 아니면 알코올이 필요하거든요. 오늘은 운동을 부득이하게 못 하게 되었으니 술이라도 마셔서 몸을 풀고 자야 아침에 그나마 덜 피곤하거든요. 사실 운동을 하거나 못 하거나, 돌아오는 길에는 집 근처에 있는 술 가게에 들러서 Oregon 주에서 나온 Pinot Noir가 있나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공사 때문에 차가 막혀서 늦었더니 문을 닫았더라구요. 운동도 못했어, 술가게도 못 들렀어, 야근은 했지만 야근 수당은 없어… 삶에서 노력을 해도 결실을 못 얻는 순간을 좌절이라고 한다던데, 그럼 바로 이게 좌절인 것이겠죠?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열 두시 넘은 시간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달리기를 20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운동 못할때를 대비해서 사 둔 아령으로 내일 도시락 반찬으로 싸 갈 닭고기를 구우면서 늘 하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죠. Circuit Training으로 두 셋트를 해야 되는데, 두 번째 셋트를 밥을 안치며 하던 와중에 쌀벌레들이 쌀에 서식하는 것을 발견, 얼마 안 남은 쌀들을 모조리 꺼내 쌀벌레들을 박멸하느라 결국 두 번째 셋트는 마치치를 못했습니다. 아, 이제는 쌀벌레들마저 저의 육체적인 안녕을 위협하려 들고 있다니, 역시 저는 너무 만만한 존재였던 것이죠. 하여간 혼자 살아서 제일 기분 나쁜 때는 바로 이런 때에요. 쌀 같은 것들을 너무 오래 먹어서 벌레가 생긴다거나, 아무리 점수를 깎으려 깎으려 해도 깎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게 뭔가를 만들었는데 결국 너무 많이 만들어서 다 못 먹고 버려야 되는 일이 생긴다거나… 앞으로는 10kg이상 되는 쌀은 사지 말아야 되겠더라구요. 이런 일 또 생기면 짜증 날테니까요. 역시 가정 주부의 삶은 험난한 것이라는 걸, 이럴때 뼈에 사무치게 느끼곤 하죠. 저의 집안일에 대한 기본 개념은 사실 그렇거든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100에 40만 해도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자질구레한 집안 일들은 그냥 40 정도에서 멈추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더 유익하고 발전적인데에 써야 한다구요. 예를 들어서 입자마자 구겨지는 빤쓰따위를 다림질하는 일은 이제 선진대한민국의 가정에서는 없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아니면, 다리미를 대면 타버리는 옷감을 개발해서 빤쓰며 난닝구 따위를 만들어 마초남편의 다림질 욕구를 원천봉쇄하거나… 때로 보면, 사랑이 깃들었다는 차이 말고 가정부와 가정’주’ 부의 차이가 무엇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네, 물론 사랑이 제일 크죠. 그러나 모두가 사람인데 그렇게 반복되는 노동을 수십년하고도 매초마다 사랑을 불어 넣을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성자인 것이죠. 자꾸 이렇게 말을 하다보니 분위기가 주부의 성스러운 가사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쪽으로 흘러간다고 오해하실 분도 계실텐데, 그게 아니라 저는, 그저 그 가사 노동을 너무 당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얘기를 술 먹은 김에 하려는 것일 뿐이에요. 저는 직장도 있으면서 가사노동도 그만큼 하시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일요일부터 좀 심난했어요. 일은, 뭐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다가 제가 워낙 사회 생활 못하는 종족인지라 뭐 이제는 둔감한데, 가끔은 일의 바깥 영역에서도 저를 심난하게 만드는 일이 생기네요, 신기하게도. 사실 저는 언제나 디테일을 구구절절이 말하는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 은유의 보자기와 비유의 커텐을 동원하여 핵심을 가리고 변죽만 울려대는 아주 못된 버릇을 키웠기 때문에 무엇인가 말하는 것 같으면서 말하지 않는 때가 더 많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할 생각이지만, 아주 가끔은, 제가 사람들에게 그 어떤 기대나 바램도 주지 않기 위해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발버둥치는데 반해 사람들은 그런 기대와 바램들을 저에게 말할 때, 저는 그 사람들이 진짜로 저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그렇게 얘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는 그저 대상일 뿐이고 자신의 욕구가 더 앞서기 때문에 그걸 말하는 것인지 정말 분간을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더라구요.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저에게 ‘집단적으로’ 가지는 기대 Collective Expectation 는 언제나 제가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았었나 싶어요. 개개인의 기대는 모두가 다 이성적이고 제가 수용할 수 있고, 또 그럼으로써 그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한데 합치면 제 어깨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덩어리가 되는 듯한 느낌… 저에게도 불특정 다수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저는 정말이지 제가 그런 기대를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들을 짓밟아 버리려고 애썼다니까요. 저는 제가 그렇게 누군가에게 기대를 ‘또’ 가지는게 너무 싫으니까요. 이제는 기대를 못 이뤄주는 사람이 미워지는게 아니에요. 그런 기대를 가지는 제가 미운 것이죠. 그 사람들이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들인지 아닌지, 저는 이제 분간할 능력도 없고 평가하고 싶지는 더더욱 않거든요. 아뇨, 그렇다고 해서 기대까지 하지 말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아마도 애 쓰겠죠. 그렇지만…

제가 보온병에 담아왔던 술이 Irish Mist였는데, 너무 달아서 찾아보니 아이리시 위스키에 꿀과 뭐 잡다한 것을 섞어 만든, 거의 식후주에 가까운 것이었네요. 너무 달아서 냉장고에 케잌시럽 만들때 쓰려고 사다 놓은 라이트 럼을 섞어도 좀 그렇네요. 커피를 담았던 보온병에 담았더니 딱 커피캔디를 녹여서 싸구려 보드카에 섞은 맛이라고나 할까요… 운동도 했겠다, 술도 마셨겠다. 시간은 새벽 두시에 가까웠겠다… 이제 자면 되겠네요. 알콜의 힘을 빌린 덕에 오늘 밤에는 꿈도 안 꾸리라는 희망을 안고 자러 갑니다.

 by bluexmas | 2007/07/19 14:56 | Life | 트랙백 | 덧글(8)

 Commented by 세온 at 2007/07/19 15:22 

‘은유의 보자기와 비유의 커텐을 동원’하기까지도 종종 용기가 필요할때가 있는것 같습니다. 가끔 무슨 일이있어서 마음이 답답하면 구구절절 장황하게 문장을 다듬어 써놓고도 다시 한번 읽어보면 속알갱이는 쏙 함구하고 그 주변에 레이스 줄줄 달듯 장식만 해놓은 경우가 저는 많더라구요. 들쩍지근한 술은 와인과는 또 다르게 마음을 위로하는것 같습니다:) 마음 가는 상황이 빠른 시일내에 사근히 수그러들기를 바랍니다 🙂

 Commented by 카렌 at 2007/07/19 18:41 

꿈도 없는 단잠 주무시길 바래요 🙂

 Commented at 2007/07/20 02: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7/20 04:3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7/20 13:27 

세온님: 술이 너무 달아서 위안이 잘 안되더라구요 안타깝게도… 장식이 많아지는 이유는 때로 완전히 드러내기가 두려워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카렌님: 하지만 뭔가 꿈을 꾼 것 같아요(…)

비공개 1님: 역시 호러에 소질이 있으신 것 같아요^^ 뭐 좀 안타까운 얘기죠?

비공개 1님: 쌀벌레 너무 무서워요. 게다가 유충이라면 더더욱T_T 가족분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사실 혼자 지내다가 집에 가족이 오면 뭔가 모르게 힘들어지는 부분이 있죠. 그 많은 부분은 제 생각에 다른 나라에 살아서 그런 것 같아요. 물론 또 다 큰 어른이다보니 사생활도 그렇구요…

그리고 글씨 얘기는, 자꾸 하시면 저 민망해진답니다-_-;;;

 Commented by basic at 2007/07/21 14:30 

뭐랄까. 조금은 가사노동에 느슨해져도 좋으실 것 같은데; (글의 요점은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요; 뜬금없는 덧글;;;)

 Commented at 2008/02/12 19:4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2/13 12:01 

싫은건 때려 죽여도 싫은거에요.

쌀은 냉장고에 보관한지 아주 오래 되었으니 걱정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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