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슨 레스폴 스튜디오 2009

경비실 선생님 앞에 있을게요, 라는 문자를 받고 젊은 사람이 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거의 아들뻘일줄은 몰랐다.

마음은 계속 먹어왔지만 실행은 못했던 기타 정리하기에 드디어 착수했다. 주말에 벌어졌던 일련의, 어쩌면 사실 아무런 상관 없는 일들 덕분이었다. 때로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가능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싶다고.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길라치면 잘 될리 없다. 그렇게 다 털어낼 수 없을 만큼 얼키고설킨게 삶이니까. 어쨌든, 손이 잘 가지 않는 것들 순으로 정리하기로 생각하고 언제나 1번이었던 후보를 올렸다. 깁슨 레스폴 스튜디오 2009년산이었다.

벌써 12년이나 지났다니. 그렇게 미국을 떠나기 직전, 나는 한편 많은 것들을 버리고 또 많은 것들을 사 모았다. 후자는 대체로 음악과 관련된 잡동사니들이었다. 돌아가면 남는 시간에 음악을 만들어야지. 지금 생각해보면 제정신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요즘 말하는 보복 소비나 ‘패닉 바잉’에 가까웠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기타는 그게 무엇이든 소비의 정점에 있었다.

이게 좀 더 ‘moxie’를 가지고 있는데? 같은 모델이 같은 색깔로 두 대가 있어서 직원에게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이라면 내가 충분히 직접 고를 수 있을 텐데, 그때는 소리로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른 기타를 들고 금요일 저녁이면 꼭 들르곤 했었던 기타센터를 마지막으로 나섰다. 이름이 마크라고? 나랑 가장 친한 친구 이름과 같네. 그렇다, 친구들도 이제는 언제 다시 볼지 기약이 없었다. 출발 전날 밤, 친구들이 보러 오겠다는 걸 완곡하게 사양했는데 아직도 후회한다. 그때는 왠지 친구들을 볼 낯이 없었다. 아니, 친구들을 보면 정말로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너무 실감한 나머지 비참해질 것 같아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딱히 마음이 가서 고른 기타가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저 ‘좌펜더 우깁슨’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산에 맞았기 때문에 고른 모델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소리를 내고 싶은지 몰랐다. 시간을 들여 얼마든지 찾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한 5년 전부터 이제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기타를 다시 잡기 시작하면서 원하는 소리를 만들기도 또 찾기도 했지만 마지막까지 이 기타에게는 그런 기회를 주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처분하려고 내놓았다. 실질적 상태는 손을 안 댔으니 매우 좋지만 관리를 잘 안 해서 겉보기 상태는 별로였으므로 아주 싸게 내놓았다. 중고등학생 쯤 되는 아이가 있는 집에서 첫 번째 기타로 사주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워낙 싸게 나놓아서 그런지 금방 연락이 엄청나게 많이 왔다.

그런 가운데 바로 10분 전에 내놓은 연습용 앰프를 사겠다고 한 사람이 기타도 사고 싶다고 다시 문자를 보내서 거래에 응했다. 이후 밤 늦게까지 더 많은 연락이 오면서 심지어 웃돈을 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았지만 이미 약속을 했으므로 그렇게 팔고 싶지 않았다. 웃돈을 주겠다는 곳은 연습실이라고 했다. 동호회가 찾아오는데 갖춰두려고요. 재판매요? 글쎄요, 언젠가 모든 악기는 팔리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찾아온 청년을 본 순간, 내가 괜찮은 결정을 내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 주인의 손에 넘어난 뒤의 운명이야 내가 관여할 바가 전혀 아니지만 그에게 이 기타가 정말 쓸모 있을 것 같아보였다. 아파트 벤치에 앉아 잠깐 상태를 확인하고, 청년은 기타와 앰프값을 온라인 송금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케이블 하나 넣었어요. 어떤 연유로 나에게는 쓰지 않은채 쌓아 둔 기타 케이블이 많아서 그것도 하나 챙겨 넣었다.

그렇게 기타를 보내고 집에 들어오자 놀랍게도 마음이 매우 후련했다. 물론 팔아서 생긴 돈 때문은 아니었다. 악기는 무생물이고 물건일 뿐이지만 소유자의 애착을 먹고 산다. 아직도 이유를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지만 나는 이 기타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떠나오던 순간의 마지막 소비여서 그랬던 건 아닐까? 이 기타만 보면 당신의 기억이 떠올라서? 아니면 마음에 엄청 들지도 않는데 정말 보복소비하듯 그렇게 사서? 나이를 먹고 한 가지 깨달았으니, 이제 나의 생각보다도 빨리 잊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또 금방 잊을 것이다.

어젯밤 잠시, 보내기 전에 요즘 만드는 노래의 한 부분이라도 녹음을 해서 남겨 둘까 생각하다가 말았다. 지금까지 12년 동안 거의 손대지 않았는데 더 이상 미련을 품지 말고 그냥 보내주자. 기억을 더듬어보니 2009년 여름인가 이 기타를 치는 짧은 영상을 찍어 놓았다. 재작년에 이사하면서 당시 쓰던 맥북을 버리기 직전 깨진 스크린을 넘어 간신히 추출한 파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게 기억해야지.

벤치에서 하드케이스를 열자, 팔꿈치가 닿았던 부분을 뺀 몸통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청년은 잠깐 기타를 들어 쳐 보고는 상태가 좋다며 좋아했다. 얼른 가. 잘 지내. 미안했다. 나는 청년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훨씬 전에 등을 돌려 집으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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