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브랜딩 12년차 경험담

얼마 전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직업관을 드러내는 글이었는데 그 자체에는 내가 할 말이 없지만 ‘셀프 브랜딩’ 이야기가 나와서 경험담을 정리해보겠다. 그 글과 관련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0. 미국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 과정에 1년 몸 담았다가 취직했다. 따라서 늦게 취직했고 4년 일한 뒤 귀국해서 글을 쓰기 시작해 올해로 프리랜서 12년차이다. 처음 한국에 돌아와서 좋아하는 음식책의 번역 샘플과 블로그에 써온 글 몇 편을 이력서와 묶어 출판사와 잡지사에 무작위로 보냈고 그 가운데 연락이 온 곳과 일을 시작해서 조금씩 지평을 넓혀나갔다.

1. 충동적으로 글을 쓰기로 결심했지만 과정까지 충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2004년부터 블로그에 글을 꾸준히 쓰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내 글쓰기 능력이 건축가로서의 능력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직장생활을 해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보수의 수준이 비슷하다면 혼자 글쓰기를 장기적으로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2. 글에서 말하는 ‘셀프 브랜딩’의 개념이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개인이 직장 등 급여를 주는 단체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의 업무와 역량을 알려서 생계를 해결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왔다. 프리랜서가 셀프 브랜딩의 주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3. 만약 그게 아니고 직장인이지만 직장 외부에서는 다른 정체성으로 통하도록 자신을 알리는 행위가 셀프 브랜딩이라면 전제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직장이다.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지 않는다면 또한 직장에서 역량 있는 인력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셀프 브랜딩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3-1. 사람들은 언제나 보고 있다. 당신이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다 알고 있다.

4. 말하자면 ‘셀프 브랜딩=직장인의 부업’이라면 본업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의미가 없다.

5. 부업은 본업 만큼 돈을 벌어주지 않고 본업을 방해할 가능성도 높다. 나는 여느 직장인과 반대로 본업을 글쓰기로 삼고 소득이 더 잘 나오는 부업을 시도한 적이 있다. 들이는 시간에 비해 소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으므로 어느 시점에서 결국 접었는데, 사실 본업이 일정 수준 이상 침해 받는 걸 두려워했다. 당시 나는 엄청나게 많은 소득을 벌어들이지 못했지만 이미 음식 필자, 혹은 음식 평론가로 정체화가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부업을 하느라 본업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일감이 끊기고, 결국 정체성도 사라져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부업의 소득이 높더라도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업은 그야말로 본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셀프 브랜딩을 부업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정확히 무엇을 얼마나 얻고 싶은가?

6. ‘셀프 브랜딩=네트워킹’일 수도 있다. 12년 동안 일하면서 한 순간도 네트워킹을 좇아 본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인간관계가 허무하다고 여기는 데다가, 직업의 특성상 사람을 많이 만나면 본업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 또한 능력이 없는데 네트워크를 통해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본업을 잘 한다면, 그래서 자기 업무 세계 내에서 좋은 평판을 키워 유지할 수 있다면 일은 계속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네트워킹이 안되어 있어서 들어오지 않는 일들도 분명히 있다. 나는 다만 그런 일들을 하지 않더라도 본업의 핵심을 방해받지 않고 싶었다.

6-1. ‘n잡’이 육체적인 일의 집합이 아니라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잘하기란 힘들기 이전에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 글쓰기를 예로 들자면 쓰기에 적절한 상태로 돌입했다가 나가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투잡을 뛰었던 시절 이게 내가 예상한 수준보다도 더 어려움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선하다.

7. 이제 직장 생활은 안 한지가 오래되어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프리랜서 세계에서 역량이나 평판은 별 게 아니다. 연락 잘 받고 정해진 마감에 원고를 잘 납품하면 그만이다. 만약 일이 마감보다 늦어진다면 발주처에서 연락이 오기 전에 알려 주는 것도 권한다. 글쓰기는 ‘open end’ 작업이므로 사실 100퍼센트가 없다. 잘 써서 보냈다고 생각한 글도 나중에 뜯어보면 정말 구둣점 하나라도 고칠 데가 나온다. 따라서 주변에는 늘 ‘85% 정도의 완성도로 제 시간에 결과물 보내기를 목표로 삼으라’고 이야기한다. 그대로 넘어가면 좋고 아니라면 마감과 발행 사이의 시간이 있으니 그때 양해를 구하고 고치면 된다.

8. 대략 분기, 혹은 반기에 한 번 정도 원고 수정 요청이 들어온다. 재작업률이 낮을 수록 모두에게 좋다.

9. 일반 소비자보다 발주처를 향한 브랜딩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2016년 언저리에 논란이 많이 되는 글을 써서 실수요자들에게 혹평도 많이 받았지만 그렇다고 일감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10. 셀프 브랜딩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돌아보면 프리랜서 12년 경력 가운데 7년차 쯤 브랜딩이 완성된 것 같다. 브랜딩이 완성됐다는 의미는, 내가 하는 일과 완성도가 알려져 일정 수준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 된 것이다.

11. 물론 ‘일정 수준’만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다. 세상에 대체 불가능한 인력은 없다고 믿는다.

12. 프리랜서에게는 지속 가능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지속 가능성은 세계의 존재 유뮤가 결정한다. 직장 생활이 지겨워서 프리랜서가 되고 싶다면 진지하게 그리고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내가 어떤 세계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 세계를 외부로 드러내고 싶은가? 그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나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없다면 프리랜서로 오래 일하기가 어렵다.

13. 물론 세계가 없이 보수가 나오는 서로 다른 많은 작은 일들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돈을 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물을 엮어서 세계를 확장해 지속가능성에 시너지 효과를 줄 수가 없으므로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14. 재택근무가 늘 좋은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워낙 잘 맞기 때문에 12년 동안 그럭저럭 해오고 있지만 그래도 답답할 때가 꽤 많다. 힘들고 외로울 때 사람은 다른 사람들 힘에 이끌려 움직일 수도 있는데 재택근무에서는 그걸 전혀 추구할 수 없다.

15. 직장인이든 아니든 셀프 브랜딩을 위한 수단들, 즉 SNS 플랫폼들은 ‘빌드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블로그/홈페이지는 올해로 17년째 운영하고 있고 트위터와 인스타그램도 10년 이상 써왔다. 하지만 이런 걸 오래 했다고 세계를 확장했을 때 반응이 단박에 오지 않는다. 유튜브 채널을 본격적으로 운영했는데 하루에 구독자가 한두 명 늘면 다행이다. 세계는 넓고 레드오션이 아닌 곳이 없다.

16. 청중/소비자는 휘발성이 강하고 엄하다. 호응과 공감은 늦고 돌아설 때는 빠르다. 부정적인 반응은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만큼 긍정적인 반응이 많아 상쇄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혹평에도 호평에도 너무 휩쓸려 ‘멘탈이 나가면’ 곤란하다.

17. ‘일 잘 할 생각이 없는 개인’이라는 브랜딩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어느 쪽에서는 많은 숨겨진 속마음의 대변인으로 엄청난 공감을 얻을 수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완벽한 커리어의 자살 행위일 수 있다. 직장인 쪽은 모르겠지만 프리랜서 세계에서는 타인의 대변인으로서 셀프 브랜딩은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18.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럭저럭한 직장을 큰 무리 없이 다니고 있다면 프리랜서의 세계는 넘보지 않는 게 자신에게 바람직하다.

18-1. 직장의 울타리는 당신을 생각보다 많이 보호해준다. 아닌 것 같다면 그만 둬보라.

19. 퇴사학교 같은 데 돈 쓰지 말자. 13번 항목 참고.

20. 내가 정말 잘 할 것 같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도 지겹고 싫을 때는 아주 많다.

마지막으로, 세대론은 적당히 끼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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