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 도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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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는 인스타그램에 먼저 올렸다. 그럼 여기엔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까. 블로그를 버려 두었느냐고? 그런 건 아니다. 개가 똥을 끊을 수는 있어도 내가 블로그를 끊을 수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에너지가 전혀 없었다. 이사를 마친 6월부터 정말 본격적으로 ‘조리 도구의 세계’ 작업을 시작했다. 일간지 연재 등 당장 생활비가 들어오는 일들의 마감을 간신히 맞추고 지쳐 널부러져 있기를 몇 개월, 그 사이에 이 책의 원고 작업을 끼워 넣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결국은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본의 아니게 예전보다 훨씬 더 고립된 환경에 나를 밀어 넣고 나서야 작업이 가능해졌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원활하고 매끄럽게 돌아간 것은 절대 아니었다. 매주 및 격주 연재 하나씩이면 일단 마감이 기본으로 월 6회이다. 거기에 비정기적인 청탁 등에 응하면 월 최소 8회, 주 2회의 꼴이 되어 버린다. 결국 매주 5근무일 가운데 2일을 뺀 나머지 3일에 책 작업을 포함한 나머지 일을 해야 했으니 블로그에 글-그것도 음식 관련-을 쓸 에너지가 전혀 없었다. 이런 경우는 블로그 운영 15년 동안 처음이었다.

그래도 쓰고 싶어서 단 몇 줄이라도 잡담이라도 올려보자고 마음 먹었지만 원고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자 그마저도 할 수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지난 6월부터 지금까지 10개월 가까이 블로그에 잘 쓰지 못했고, 적어도 한 달은 더 상황이 바뀔 것 같지 않다. 이런 그동안의 사연 자체가 ‘조리 도구의 세계’라는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남은 책의 소개이다. 그렇게 작업을 했다. 원고는 많지 않았지만 책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주변 작업에 시간과 공이 많이 들었다.

이번 토요일에 올라올 일간지 인터뷰에서 ‘왜 음식 평론가가 조리 도구에 대한 책을 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대답은 아주 짧고 간단할 수도, 길고 복잡할 수도 있다. 짧고 간단한 이야기부터 하자면 아무도 내지 않으니까 내가 낸다. 어차피 동료가 없는 음식 글쓰기의 바닥이므로 편하게 말하자면 아무도 이런 책을 낼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각해도 낼 수 없을 것이다.

2013년부터 7년에 걸쳐 단행본 다섯 권을 냈다. ‘미식 대담’을 제외하면 연재 등으로 어디엔가 미리 공개된 적이 없는, 전부 새롭게 쓴 글이다. 예정보다 대부분 늦게 나왔지만 그동안 내가 미리 세워 둔 계획과 겹치는 주제, 소재, 내용을 담은 음식책은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 누가 무슨 책을 어떻게 내든 나와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이런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비웃고 조롱한다. 여러분들은 대체 뭘 하고 계신 겁니까?

한편 이제는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어차피 아무도 낼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해도 못 낼 테니 나는 그저 여건만 닿는다면 내가 필요하다고 믿는 책들을 써서 내면 된다. 비평이 필요한 시점에 비평집을 냈고, 이제 그 시기가 지났고 기본에 대한 논의를 채워야 한다고 믿으니 이런 책을 낸다. 음식 평론가가 이런 책을 낸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요리사든 요리 연구가든 누군가 자신의 도구에 대한 책을 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늘어놓고 보니 길고 복잡한 이유까지 다 말해버린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음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결국 관련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 버린 지난 15년 동안 많은 것들을 접해 오며 형성한 비전을 처음으로 거의 전부 반영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한편 뿌듯하지만 또 한편 이것이 마지막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끊임없이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하루라도 불안과 자괴를 비롯한, 단 1초도 멈추지 않고 끊임 없이 가지를 뻗어 나가는 복잡한 감정을 내려 놓고 당장의 성과를 즐기고 싶지만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래도 어쩔 수 없고 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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