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과 과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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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한 덩이의 속내

3호선 압구정역. 긴 구내를 걷는데 한 간이 매장의 빵이눈에 들어 온다. 이름하여 ‘치아바타(ciabatta).’ 나는 그 매장을 오가며 오랫동안 관찰해왔다. 분명히 신제품이 맞다. 그래서 눈에 더 잘 들어온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 빵은 전혀 치아바타처럼 생기지 않았다. 단면이 너부죽하지 않고 둥글다. 차라리 짤막한 바게트라 보는 게 맞다. 그럼 치아바타가 아니다. 생김새에서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어 로 ‘쓰레빠’를 치아바타라 부른다. 맞다, 치아바타는 이탈리아 빵이다. 프랑스 빵 바게트도 사정은 마찬가지. 생김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같은 반죽이라도 두 번째 발효직전에 빚는 모양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지어준다. 원통형이면 바게트(baguette), 이삭을 닮았으면 에피(epi)다.

음식, 특히 제과제빵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정도는 입에 담을 수 있다. 특히 음식 저널리즘 종사자에게는 기본이다. 정말 다들 여기까지는 읊는다. 이미 문서화된 음식의 어원, 역사 등을 나열 한다. 현재 한국 음식 저널리즘의 몸통이다. 평양냉면이라면 전문적으로는 ‘조선 순조(純祖) 때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한겨울 음식으로는 평안도의 냉면이 으뜸’이라는 말이 나온다’라고 역사를 언급하거나(매체 기자식, 「집중탐구: 냉면 맛의 비밀」, <월간조선> 2011년 7월호, http:// 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107100032& ctcd=F&cpage=10), 그보다 간단하게는 ‘수육은 대개 쇠고기, 편육은 돼지고기’임을 구분하는 격(맛집 블로거식)이다.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기존 자료만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이렇게 몸통은 언제나 튼실하지만, 언제나 머리가 없다. 정작 역사며 명칭이 이해를 돕는 음식의 핵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맛 말이다. ‘쓰레빠처럼 생겨 치아바타’라는 사실보다 그 이유가 더 중요하다. 치아바타는 왜 하필 너부죽할까. 그 이유가 빵의 정체성은 물론, 맛과도 관련 있다. 제빵의 인과관계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정답이 의외로 간단한데도 그렇다. 밀가루 대비 물의 비율이 여느 빵보다 높아 반죽이 처진다. 제빵의 핵심은 계량이다. 밀가루 양을 기준으로 다른 재료의 비율을 백분율화한다. 이른바 제빵사의 백분율(Baker’s Percentage)이다. ‘물 60퍼센트’라면 밀가루 무게 대비 물을 60퍼센트 써 반죽한다는 의미다. 밀가루 100g마다 물 60g을 쓴다. 또한 아무 빵집에 들어가 집어든 아무 빵의 평균적인 밀가루 대 물의 비율이기도 하다. 탄성이 적당해 반죽을  다루기 쉽다. 치아바타는 이 비율을 훌쩍 넘긴다. 대개 물이 70퍼센트 이상이다. 반죽이 거의 흐르다시피 묽고, 끈적거려 다루기도 훨씬 어렵다. 발효를 시키고 오븐에서 구워도 봉긋하게 솟아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쓰레빠’다.

수분의 차이가 궁극적으로 맛에도 영향을 미치는가? 물론이다. 총체적인 경험으로서 맛(flavor)은 오미(五味, 짠맛, 단맛, 쓴맛, 신맛, 감칠 맛)의 맛(taste), 향(aroma), 질감(texture)의 복합체다. 이 가운데 빵 반죽의 수분 차이는 질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제빵에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공간전체를 데워 재료를 익히는 오븐 굽기는 두 단계의 과정이다. 첫째, 공간의 열 에너지가 옮겨가면서 반죽 내부의 수분이 빠져나온다. 제빵사가 ‘말리기’라 일컫는 과정이다. 또한 두 번에 걸쳐 반죽을 부풀린 효모가 마지막으로 열에 반응하면서한단계 더 빵을 부풀리고 장렬히 숨을 거둔다. 이때 효모가 불어넣은 공기 방울의 흔적이 빵의 속살에 남는다. 소위 ‘기공’이다.

치아바타는 반죽의 물 비율이 높아 공기방울의 크기가 굉장히 불규칙하고, 이 흔적이 그대로 남은 속살의 질감은 성긴 한편 촉촉하다. 물 비율이 높은 반죽의 특징이자 장점인데, ‘열린 속살(open crumb)’ 로 통하며 이루기 쉽지 않다. 언급했듯 일단 반죽 다루기부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반죽의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릴 수 있다. 대량 생산하는 ‘공장빵’의 속살이 100퍼센트 닫혀 있는, 즉 조밀하고 규칙적인 이유가 있는 것. 따라서 쓰레빠처럼 길고 너부죽하더라도 기공이 조밀하다면 그건 치아바타가 아니다. 쉽게 만들기 위해 정체 성을 희생시킨 방증이다.한편 두번째는 맛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단계다. 수분이 다 날아간 다음, 빵 겉면의 아미노산과 당 등이 열과 반응해 노릇한 색과 더불어 복잡한 맛을 들인다. 처음 발견한 프랑스 화학자의 성을 따서 마이야르 반응이라 부른다. 구운 스테이크의 표면이나 간장의 짙은 색도 같은 원리 덕분이다. ‘탔다’는 이유로 겉이 노릇한 빵을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고기도 마찬가지), 허연 빵 껍 데기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물론 그 ‘치아바타’도 허여멀건 했지만, 일단 모양에 집중하겠다.

한국 음식 문화의 현실과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

지하철역 간이 매장에서 팔리는 빵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길다면 참으로 길게 늘어놓았다. 이름과 생김새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문제 라고 했다. 이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의 두 가지 얼굴이다. 아수라 백작처럼 상반된 둘이 아닌, 같지만 크기가 다른 두 얼굴이 다. 작게는 무관심의 현실이다. 빵 하나를 만들면서도 이름과 생김새 사이의 잠재적 관계에 대해 따져보지 않는다. 그 결과 빵은 본질과다른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게 문제인가? 당연하다. 앞서 언급했듯 물 비율이 높을 수록 빵 반죽은 다루기가 어렵다. 쉽게 다 루기 위해 빵의 정체성을 침해하면서까지 물 비율을 줄인다는 혐의가 짙다. 그 빵은 그냥 다른 게 아니라, 편하게 만들기 위해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열등하다.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열등한 빵을 먹고 산다. 선택은 다양해 보이지만, 거의 대부분 열등하다. 따라서 침소봉대의 위기는 상존하지 만 현실의 더 큰, 두 번째 얼굴이보인다.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 현실이다. 본디 이탈리아가 고향인 빵을 지하철 간이 매장에서도 살 수 있다. 이탈리아와 한국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줄었다. 밥이 주식이라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자랑스러워까지 하는 나라가 한국이니, 밥과 빵 사이의 심정적거리도줄었다고볼수있다. 그렇다면 긍정적이지 않을까? 최소한 다양성의 확보만큼은 장려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그저 맛없는 빵이 한 종류 더 늘었을 뿐이다. 지하철역까지 진출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치아바타는 이미 많이 대중화된 빵이다.잘 만든 건 없지만 대개 모양이라도 닮았다. 최소한 문법이라도 흉내낸다는 의미다. 하지만 분명 신제품인 빵이 그마저도 파괴했다. 결국 이것은 퇴보다.

음식의 현실도 치아바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위 요리전성시대라고 한다. ‘쿡방’이 장르화되었고 그에 힘입어 셰프라 불리는 존재가 TV쇼의 단골 출연자로 자리잡았다. 모두가 음식을 말한다. 관련 서적이 쏟아져나온다. 식을 줄 모르는 ‘인문학’의 인기와 만나 ‘음식인문학’책이 잘 팔린다. 이 모든 것의 기초인 블로그나 트위터 등 SNS는 음식점 유랑과 요리 시연 이야기 및 사진으로 진작 포화상태다. 하지만 식탁은 여전히 초라하다. 식종과 가격 불문, 맛이 없다(‘맛 없음’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차차 규정하겠다). 혹자는 ‘세계 음식이 한데 모인 서울’이라 말하지만 모두 귤이었던 탱자다. 높은 임대료와 요식 자영업의 아마추어리즘, 음식과 요리에 대한 몰이해가 한데 뭉쳐 실패는 거의 예견되었다. 잘 만든 한 접시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외식만의 문제라고? 식탁을 스스로 차리기 위한 노력은 더 부질없다. 식재료는 질도, 다양성도 크게 떨어진다. 거의 비슷한 품종이라 한정된 조리법만 적용할 수 있는 감자 두종류, 당도로만 품질을 가르는 사과 같은 식재료가 소비자의 혀를 묶는다. 묵은 경구 빌어 쓰기를 극도로 경계하지만, 진정 ‘소문난 잔치에 먹잘 것 없는’ 판국이다. “음식을 예전에 비해 더 유행 타는 대상으로 취급한 나머지, 식사는 더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린” 현실(『식탁의 기쁨』, 15쪽, 애 덤 고프닉, 이용재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4) 이다.

이렇게 식사가 더 사소해진 현실 속에서 음식 비평의 필요성이 고개를든다. 비평의 본질, 즉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 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하는 행위’에 기댄 필요성이다. 음식이 왜 굳이 유행의 대상인지는 사실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왕 쏠리는 관심으로 탄력 받아 음식을 담론의 장에 올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대상인 식사—食事, ‘먹는 일’이니 결국 음식과 얽힌 모든 제반 사안 및 행위—가 한없이 사소해지는 현실에서 음식 비평 또한 자유롭지 않다. 사소함의 진창을 헤치고 ‘인정 투쟁’을 벌여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그렇다, ‘인정 투쟁’이라고 했다. ‘음식평론가’라는 직함을 내걸고 전업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인정해야 할, 엄연한 현실이다. 인정 투쟁의 과제는 여러 갈래다. 빠짐없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야 하는, 촘촘한 과제다.

서양 음식 비평의 역사

대체 과제는 얼마나 촘촘한가. 음식 비평의 존재 자체를 증명해야 할 정도로 촘촘하다. 음식 비평 자체가 존재하며, 또한 한국에서도 가 능하다는 증명이다. 음식 문화 연구가가 “한식 조리법의 표준화도 이뤄지지 않은 마당에 음식 비평은 어불성설이다(「음식 평론은 넘치고 담론은 없다」, <경향신문> 2010년 2월 2일자)”라고 말하는 현실이다. 5년 전 기사지만 아직도 유효하다. “입맛은 주관적이라 음식을 평가할 수 없다”거나 “한국에서 음식 비평이란 시기상조다”, 심지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는 주장마저 음식 비평의 존재 가능성을 일축하려 든다. 더구나 이러한 회의가 음식 저널리즘 종사자로부터 나온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난감하지만, 그에 상관없이 음식 비평은 이미 존재한다. “음식이 당신을 정의한다(정확하게는 “Tell me what you eat, and I will tell you who you are”, 즉 ‘먹는 음식을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소’)”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익숙할 것이다. 소위 음식의 전성시대를 맞아, 더 이상 다양할 수 없는 맥락으로 각자의 음식 세계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이는 경구다. 안 들어 보기가 더 어렵다.

경구의 최초 발화자는 프랑스인 장 앙텔므 브리야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이다. 최초의 음식평론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저서 『미식 예찬』(홍서연 옮김, 르네상스, 2004)은 『맛의 생리학(Physiologie du goût)』이라는 원제답게 나름 맛의 과학적 인과관계 분석을 통한 원리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안타깝게도 비과학적이다. 하지만 당시의 과학기술을 감안하면 적절하다. ‘기나피(幾那皮, 키니네의 원료)의 비만 치료 효과’ 등을 논하는 글(『미식예찬』, 323쪽)을 읽고 있노라면, 평양냉면집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메밀의 효능에 대한 글을 읽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어여쁜 비만 여성에게 승마 권하는 세 가지 조건(같은 책, 312쪽)”은 어떠한가. 그는 본디 변호사이자 정치가였고, 궁극적으로 ‘풍류를 즐기는 마초’였다.

2010년대에 “활기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말, 최신 유행에 맞게 재단된 새 여성용 승마복, 친절하고 잘 생긴 승마 교관 청년이 필요하 지만 이 모든 조건을 갖추는 것은 매우 드물며, 따라서 그녀들은 승마를 하지 않는다(같은 책, 323-324쪽)” 같은 문구를 읽고 있노라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 이해도 간다. 18~19세기는 석탄 오븐의 일산화탄소에 프랑스 최고의 셰프1)가 요절하는 시대였다. 현재 이상적이라 여기는 비평과는 거리가 멀지만, 시대 맥락으로 보정하면 최소한의 역할은 한다.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했다’는 말이다. 그와 함께 숙적이었다는 그리모 드 라 레이니에르(Alexandre Balthazar Laurent Grimod de La Reynière, 1758~1837)가 음식 비평의 양대 선구자 노릇을 했다.

한편 브리야사바랭의 사후 약 70년 뒤인 1900년대에는, 타이어 회사가 역사에 남을 새 시도를 선보였다. 요즘의 개념으로 치자면 ‘찾아 가는 맛집(destination restaurant)’ 목록이 담긴 가이드북을 내기 시작 한 것. 차로 ‘맛집’을 찾아다닐수록 타이어가 빨리 닳아 소비가 촉진될 거라는, 의외로 간단한 논리였다. 프랑스의 <미슐랭 가이드(Michelin Guide)>다. 레스토랑에 별점(및 포크. 별 아랫등급으로 존재한다)을 매기는 시도는 비평의 가치 판단을 객관화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A지역의 ‘가’ 레스토랑과 B지역의 ‘나’ 레스토랑이 각자의 방법으로 좋다고 해도, 같은 수의 별을 받았다면 그 ‘좋음’의 수준이 호환 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한마디로 다른 레스토랑끼리 수평 및 수직 비교가 가능해졌다.

약 한 세기 동안 권위를 누렸지만, 항공기를 지나 인터넷 시대에  <미슐랭 가이드>의 위상은 많이 축소되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갈래다. 먼저 공신력을 향한 의구심이다. 신분을 비밀에 부친다는 평가단—복 수 인력이라는 의미—의 방문 횟수를 비롯한 투명성 및 공정성, 프랑스 음식 위주의 편향성 등이 내부 폭로2)를 통해 도마에 올랐다. 인터넷 시대의 정보 권력 분산 또한 약화를 가속화시켰다. 가이드‘북’ 자체의 필요가 급격하게 감소함은 물론, 비슷한 정보를 덜 권위적으로 생산 및 공유하는 인터넷 기반 플랫폼도 증가했다. 옐프(www. yelp.com)등의 평가 공유 사이트가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러한 대안에 결함이 없지는 않다. 여전히 평가의 공정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또한 인터넷 시대의 특징인 정보의 ‘질보다 양’에 기대어 성 장해 미슐랭과 수평 비교는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전문성은 떨어진다 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플랫폼의 출현이 미슐랭의 권위를 약화시 킨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2015년, <미슐랭 가이드>는 3천만 달러 의 적자를 예상하고 있는 실정이다(「Star-crossed」, James Boxell, <파이낸셜타임스> 2011년 7월 15일자, http://www.ft.com/cms/s/2/b02d5c1a- adcb-11e0-9038-00144feabdc0.html).

한편 현재 음식 비평의 최전선에는 신문의 레스토랑 리뷰가 존재한다. 플랫폼 전이 시대에 신문 또한 본질적인 존재 위기를 겪고 있지만 음식은 오히려 인터넷의 접근성을 활용한, 라이프스타일 위주 콘텐츠로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시연 비디오 등의 시각성 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음식 콘텐츠와 문화 비평의 영역이 겹치는 지점에 레스토랑 리뷰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뉴욕타임스>다. 1960년대 초반 출범했는데, 일단 입지 조건이 돕는다. <뉴욕타 임스>의 근거지인 맨해튼은 다민족국가로서 미국의 상징과 같은 도 시다. 실제로 이민자의 관문 역할도 했다. 출신국 문화의 향수와 유럽 을 향한 동경—또는 자격지심?—이 한데 어우러져 원동력으로 작용, 단일 도시로는 세계 최고의 음식 공동체다. 거기에 미슐랭식 별점— 한개더많은네개가최고점—으로수평및수직비교가능한객관 화 지표를 갖췄다.

이래저래 주 1회 실리는 <뉴욕타임스> 레스토랑 리뷰는, 미국 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미슐랭에 뒤지지 않는 권위를 지닌다. 관련 일화도 많다. 가장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배령’이다. 미슐랭과 달리 <뉴욕타임스>의 레스토랑 리뷰는 1인 실명 체제로 운영된다. 평가자의 존재가 노출된다는 말이다. 평판은 즉 매상이니, 레스토랑에서는 당연히 촉각을 세운다. 담당 기자의 이름과 얼굴 사진을 레스 토랑 주방에 붙여놓고 직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방문 발견시 제보 하라는 것. 기자에게는 ‘서비스’ 조의 음식이, 직원에게는 ‘현상금’인 휴가와 포상금이 나간다. 이를 막고자 변장 및 메소드 연기로 무장해 레스토랑을 방문했다는 루스 라이쉴(Ruth Reichl, 담당 기간 1993~1999) 의 일화는 책 한 권3)을채울정도로유명하다. 이렇게 레스토랑 리뷰는 다른 문화 곁가지의 비평 기사와 더불어 미국신문 문화면 콘텐츠의 한 국면을 맡는다. 인지도 차이야 있겠지만 도시의 이름을 제호에 내건 지역 신문은 대개 레스토랑 리뷰에 지면을 할애한다.

1) 앙토넹 카렘(Marie-Antoine Carême, 1784~1833). 프랑스 요리의 정수라 할 수 있는 4대 소스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한 셰프. 이후 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 1846- 1935)가 5대 소스로 문법을 한 번 더 정리한 것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2) 미슐랭 평가단이었던 파스칼 레미(Pascal Rémy)가 2004년 『L’Inspecteur se Met à Table』라는 책을 썼다.

3) 『Garlic and Sapphires: The Secret Life of a Critic in Disguise』. <뉴욕타임스>에서 레스토랑 리뷰를 맡았던 기자들이 대부분 그 시절의 회고록을 펴낸다는 사실 또한 지면의 위상 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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