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비교 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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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케이크 에피데믹. 온도가 살짝 높았다. 콩은 헤어벤더. 표준스러운 맛.

13주차 커피 수업은 학기 통틀어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가는 날이다. 버 그라인더 포함, 집에 있는 모든 커피 세간 살이를 전부 챙겨가야 하기 때문. 그러니까 버 그라인더 말고도 전기 주전자, 일반 주전자, 드리퍼(플라스틱, 사기 통틀어 네 점), 필터, 온도계, 휴대용 가스 버너, 여분의 가스통, 커피 찌꺼기 처리를 위한 통과 비닐봉지, 마시고 남은 커피를 처리할 물통, 생수 몇 병, 참고 서적 여러 권까지. 게다가 수업 시간에도 설명과 별도로 계속 움직여야 한다.

하여간 이번 수업에선 비교 시음에 초점을 맞췄다. 커피의 양과 물 온도, 이 두 변수만 고정시키는 것으로도 다른 원두의 맛을 비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출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랄까(물론 드립 시간까지 통제하면 더 좋은데, 그럼 정말 정신이 없어진다). 그래서 카누 포함, 여섯 종류의 커피를 준비해, 학생들에게 돌아가며 원두의 무게를 달고 물 온도를 측정해 변수를 고정시키고(그럼 상수가 되는 건가?;) 드립을 맡겼다. 그렇게 1라운드를 마신 뒤 2라운드에는 같은 커피를 같은 조건(물 온도, 콩-물의 비율)에서 에어로프레스로 뽑아 다시 한 번 비교 시음을 했다. 그리고 미리 영향을 받지 않도록 콩은 블라인드 처리를 했다. 빼도박도 못하는 카누를 빼고는 브랜드 등은 숨긴 것. 물론 이것도 원산지, 블렌딩 여부 등등의 조건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누면 더 좋겠지만, 일단 목표는 1. 비교 시음을 위해서 몇몇 조건을 고정한다, 2. 그럴 경우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정도를 보는 게 목표라 무리하지는 않았다. 시음 끝나고 의견 교환한 뒤 공개한 원두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동서식품 카누 (인스턴트 커피 95%, 원두 5%)

2. 투썸플레이스 에스프레소 스페셜 (구운 날짜 정보 미공개)

3. 폴 바셋 에디오피아 시다모 (2015/05/10)

4. 사이트글라스 과테말라 쿠비토 버번 (2015/05/12)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https://www.sightglasscoffee.com)

5. 사이트글라스 르완다 음바사 (2015/05/12)

6. 스텀프타운 헤어벤더 블렌드 (2015/05/14)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http://stumptowncoffee.com)

좋든 나쁘든 업계 표준처럼 작용하고 있으므로 스타벅스의 원두를 포함시키고 싶었으나 이미 가지고 있는 게 넘쳐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수업 시간 외의 기회에 이미 충분히 마셔본 콩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번에 직접구매한 사이트글라스의 콩은 관련 글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정교함이 떨어진다. 저 글을 쓰고 하루이틀 뒤엔 원래 표정이라고 생각할만한 것이 나왔지만 바로 꺾이고 다시 희미해졌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샌프란시스코의 리브레 같다는 생각. 그들이 정해놓은 프로파일이 콩과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이다.

한편 개인용으로 구매한 사이트글라스의 원두보다 좀 이후에 볶은 데다가 자기 맛이 확실한 것을 포함시키고 싶어 일부러 압구정 현대백화점의 팬케이크 에피데믹 매장에서 스텀프타운의 헤어벤더를 사왔는데, 최적이라 생각하는 시기는 조금 지난 상황. 광고에서도 밝히다시피 이 블렌드는 스텀프타운의 대표작 같은 것이면서 에스프레소에도, 드립에도 잘 어울리는 다목적 콩인데 포함시킨 의도에 부합하는 맛을 내주지 못했다. 폴 바셋은 한 번 언급했으니 됐고, 진짜 와일드카드는 투썸플레이스. 요즘 유행에 맞춰 갱신을 좀 했는지 포장도 바뀌고 훨씬 덜 볶았던데 일단 완전히 썩은 것 같지는 않다(그러나 일단 볶은 날짜가 아닌 유통기한을 박아 놓은 콩은 의심을 해야). 좀 더 마셔봐야 할듯. 당장 이 글 다 쓰고 바로…

*사족

1. 나는 더치추출이 커피의 속성을 고려한, 올바른 추출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커피의 맛은 기름에 달려 있는데 이걸 찬물로 추출하겠다는 자체가 난센스. 재료의 잠재력을 겉만 핥는 조리법이다.

2. 가장 덜 귀찮게 집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캡슐커피라고 보고(물론 난 관심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에어로프레스가 가장 좋다. 유지관리 편하고 압력도 어느 정도 줄 수 있고. 다만 그라인더가…

3. 그 사이에 투썸플레이스 원두 내렸다. 먹을 수는… 있다.

4 Responses

  1. 자거스 says:

    밸브 커피집 사장님께 잠깐 물어봤었는데.. 더치커피는 질이 별로인 원두의 단점을 줄이고, 질좋은 원두의 장점을 가리는 그런 추출법이라 하더군요. 커피 본연의 성분을 뽑기 위해 에스프레소가 90도 이상의 가압추출방식, 드립도 85~90도 이상 온도추출을 하는 걸 감안하면, 찬물에서 좋은 맛을 다 뽑는건 불가능에 가깝죠..
    요샌 ‘나무사이로’의 샷추가 아메리카노도 가끔 마십니다. 원두도 다소 농도가 옅은게 많은데, 케냐 프렌치미션, 로미타샤 (보통로스팅, 다크로스팅)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100g 기준 만원이란건 불만이구요.
    나중에 시간되시면 춘천 ‘밸브’에서 블렌드 택배 주문을 해보세요.(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bluexmas says:

      그러니까요. 더치 커피 유행은 이해가 안 가고, 커피 문화에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스텀프타운 같은데서 저온 추출 커피를 마셔도 항상 바디는 부족하더라고요. 추출될리가 없으니까요. 말씀하신 곳은 시도해보겠습니다.

  2. LJH says:

    먹을 수는 있다. 라는 마지막 문장 슬프네요. 갑자기 생각이 나서 들러보니 이사오셨군요!

  1. 03/24/2016

    […] 안 맡게 된(잘린?) 대학 강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간략하게 올린 바 있는 커피 비교 시음 이야기다. 당시 학생들의 반응 가운데 하나가 흥미로웠다. 전부 시음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