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틸트-지속과 성장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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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20년 전으로 되돌려 볼까. ‘동수 선배’ 기억이 난다. 학교 앞 한 호프집의 주인이었다. 호칭 그대로 진짜 학교 선배였다. 아마도 교육학과였고 10년 쯤 선배였다. 한창 유행하던 PC 통신 학교 동호회의 일원으로 알게 되어 종종 찾아갔다. ‘생맥’도 ‘쏘야’도 대단할 건 없었지만 비슷하다면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의 가게에 찾아간다는 생각을 다들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동수 선배는 가게를 내놓고 호주로 이민을 간다고 들었다. 대형버스 면허가 있어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도 들었다. 정말 이민을 갔는지, 이승엽이 마쓰자카로부터 역전타인가를 쳤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때 응원단의 일원인가로 인터뷰를 했노라는 이야기도 들었다(이 부분은 다소 확실치 않다).

연대 앞에 그 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이가 바를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듣고, ‘이것은 2010년대의 동수 선배쯤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호프집과 칵테일 바 사이에 우열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따라서 이게 칵테일 바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나는 20년이라는 세월의 힘을 입어 칵테일 바라는 형식이 그만큼 대중화 되었다는 긍정적인 징후로 받아들였다. 칵테일 바는 언감생심, ‘우주 화장실’의 호프 ‘트웬티 섬띵’에서 죽어라 술을 마신 나의 대학시절 아니었던가. 한편 그가 ‘먹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바에 한 번 가봐야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그의 총체적인 학벌에 나는 별 관심이 없다. 중졸이든 대학원졸이든 칵테일 잘 만들고 바텐더라는 직업의 소양을 잘 이해하면 그만일 뿐이다. 다만 다녀보면 요식업의 생산 자체가 정보와 지식, 모두가 팔아먹는 “인문학”의 기반 없이 장기적 성장과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공부를 해 온 바탕과 시각으로 이 일을 이해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긍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그것이 되려 요리 분야보다도 더 많은 지식을 요하는 술-칵테일이라면야.

그래서 바텐더란 과연 어떤 존재여야만 하는가. 기능과 정서, 두 항목으로 나눠 따져보자. 일단 기능이다. ‘앤젤스 셰어’의 포스팅에서 얼핏 언급한 것처럼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 있는 원주를 굳이 섞고 희석 시키는 이유 또는 의미는,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성격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성격이라의 성패는 결국 디테일에 달렸다. 달리 말해 바텐더의 손을 안 거치느니만 못한 칵테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그 더하고 늘리고 섞는 과정에서 디테일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만 한다. 어떤 항목의 디테일이냐고? ‘Flavor=taste+aroma+temperature+texture(mouthfeel)’의 공식 안에 들어가는 요소 전부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맛과 향, 그리고 특히나 온도를 놓치는 일이 없어야만 한다. 이 부문에서 내가 받은 인상을 압축해 표현하자면 ‘일관성의 부족’이다. 종류를 막론, 한데 아우르는 표정이 없다는 의미. 이는 물론 개별적 완성도가 높으나 표정이 없는 경우일 수도, 또는 그저 개별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일 수도 있다. 완성도도 높고 표정도 분명한 칵테일은 스스로 가장 자신 있다고 꼽는 네그로니 하나였고 나머지는 이런저런 측면에서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당연하다. 먼저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완성’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 경력도 경력이거니와, 경영까지 맡는다면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경우와 견주어 보았을때 자유 만큼 성장을 위한 시간의 절대양을 최대한 확보하기가 어렵다. 한편 ‘완성’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없는 상황은 가게 전체의 여건도 마찬가지다. 철거하다 만 천장 등의 인테리어는 그렇다 쳐도 냉장고나 분리된 주방과 싱크대,  딱 10cm 만 좁았더라도 훨씬 더 효율적일 것만 같은 바와 캐비넷 사이의 거리 등 설비의 한계 또한 바텐더가 최선을 다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생계형 장사’의 한계가 어느 정도 작용한다고 본다. 이는 분명 바의 정서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일단 다른 부분 부터 짚고 넘어가자. 바로 바텐더의 정체성이다.

예전에 모 잡지사의 편집장이  ‘바텐더=스폰지’라고 규정했던 기억이 난다. 나 또한 공감한다. 100%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듣거나 기꺼이 듣겠다는 태도를 먼저 발화해 보여주되 들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옮기지 않음을 의미한다. 굳이 영어를 쓴다면 ‘passive interplay’라고 할 수 있을까. 반응하고 북돋아주되 먼저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 것이다. 만약 어딘가의 바텐더가 그런 유형이 아니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냥 가지 않으면 되니까. 아직도 “언니”가 나오지 않는 바가 드물어 그렇지, 아니라면 자기에게 맞는 바텐더를 골라서 가면 그만이다. 따라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바텐더의 정체성 또는 성격은 이 경우 나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외의 정서적 요소는 확실히 개선의 여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가장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손님에 대해 아는 척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찾아갔을때 비로소 사장이 바에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당신이 누군지 알겠다’는 제스쳐를 보였다. 이미 트위터에서 서로를 팔로우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내 사진이 걸려 있으니 알아차리기가 어렵지는 않았을테지만, 그것과 ‘누군지 알겠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건 아주 다르다. 스스로 드러내기 전까지 손님은 익명의 존재며 바텐더는 알더라도 모른척 해야 한다. ‘과연’과 ‘설마’가 반씩 뒤섞인 상태에서 바의 문을 열었는데 내가 맞닥뜨린 상황은 바의 원칙을 따져보았을때 결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경향은 SNS에서도 일관적이어서, 내-물론 직접 언급된 바 있다-가 아니더라도 직간접적으로 손님의 정체성이 엿보인다. 이는 설사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바의 덕목에 반하는 처사다. 만약 홍보를 위해 잘 나가는 사람들과 사전 합의를 맺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재고해봐야 한다. 그가 일을 배운 곳에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언급했는지 궁금하다.

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일견 자질구레하지만 바의 정체성 확립에 관련해 꼭 필요한 것들이다. 먼저 옷차림. 잘/멋지게 입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마치 집에 있다가 신발만 꿰어 신고 나와 일터에 온 것처럼 추리닝/쓰레빠 등의 조합이어서는 안된다. 나는 칵테일을 마시기도 전에 바텐더에게 실망을 품고 싶지 않다. 최소한의 의지가 필요하다. 또한 굳이 이유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지만, 왜 종이 냅킨 마저도 없고 두루마리 휴지를 돌려가면서 쓰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호프집은 물론 심지어 근처의 싸구려 떡볶기 집에서도 종이 냅킨은 갖추지 않던가. 손님이 편안함을 느끼기에는 살짝 좁은 바의 폭과, 그 위에 가장자리가 볼록하게 휘어 있는 아크릴 상판도 개선의 손길을 원한다. 음악은 어떠한가. 공간을 제대로 메울 수 있어야 손님이 어색함을 덜 느낄 수 있다. 소리의 원천인 컴퓨터를 그대로 둔 채로 스피커면 몇 개 배치해도 사뭇 다른 분위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가게나 사장의 경영 철학까지 지적할 의도는 아니지만 술의 라인업을 늘리는 것이 손님보다는 술 수집가로서 바텐더의 만족을 위한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웬만하면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지적하는 자질구레한 사항은 업장이 업장이라 스스로 전제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립 병입 업체의 싱글 몰트 등도 갖춰 놓으면 바의 위신이 사는 건 분명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 요소들의 결핍이 현재는 너무 두드러져 그 노력 또는 열정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기가 다소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사실 바 틸트의 과제는 간단히 ‘생계형 장사의 제약이 가져오는 (의도치 않은?) 아마추어리즘의 빠른 극복’이라 정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 번째는 ‘학교 앞 벗어나기’를 중장기적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다. 학교 앞은 영원히 학교의 앞이다. 매년 같은 연령대의 사람들로 물갈이가 되니 지역의 아우라가 성장하지 않는다. 한편 제대로 만든 칵테일은 결코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의 전유물이라 할 수 없다. 물론 평생 한 가지 일만 할 이유도 법칙도 의무도 없지만, 스스로 바텐더가 자신의 직업이라 생각한다면 성장을 위해서라도 학교 앞을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술에 대한 흥미와 지식을 갖춘 사람이 20년 전의 ‘동수 선배’의 전철을 밟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주문한 라프로익 기반의 하이볼에 살짝 뿌린 파슬리 가루는 분명 신선한 접근이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허브의 뉘앙스를 더하고 싶다면 맞는 답은 생 파슬리 이파리다. 최소한 그 정도라도 가능한 여건을 갖추려면 나는 바가 학교 앞을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그러한 측면에서 바텐더 또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아주 간단히 말해 ‘바텐더인데 글도 쓸 수 있는 사람’과 ‘글을 쓰는데 바텐더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듯 분명히 다르다. 나는 여지껏 재능에 대해 평가하지 않았는데 그건 눈에 들어온 게 없기 때문이라기보다, 아직 그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시간의 절대적인 양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바텐더-글 쓰는 사람’ 두 항목의 우선 순위 지정에 따라 달라진다. 그의 목표가 후자라면? 이 글에 들인 시간과 노력은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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