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핑턴포스트 코리아, 시각, 뉴스의 미래
위의 이미지와 같은 내용의 트윗을 했다. 그걸 하게 된 연유는 바로 이 글에 쓴 바 있다. 보시다시피 이미지에는 나의 트윗만 담겨 있지 않다. 바로 그 트윗 대상의 반응도 담겨 있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억지로 찾아본 것은 아니나, 절반 정도는 우연히 같은 이야기를 하는 트윗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본인이 거기에 대응-리트윗이듯 멘션이든-하는 건 보지 못했다. 그럼 같은 의견이지만 내가 발화했기 때문에 더 중요한가? 달리 말해 나의 의견을 헤아리시는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설사 그렇다면 저렇게 리트윗할 관심에 말을 걸어 불어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두 번째 이유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무시하면 그만이고, 그렇다고 생각하면 물어볼 일이다. 싸울 생각-가치도 없지만-으로 꺼낸 말이 아니므로 물어본다면 의견을 나누는 건 어려운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럴 게재였다면 굳이 이런 상황조차도 생길 일이 없겠지만.
노파심에 밝혀두자면, 나는 그를 모른다. 개인적인 감정도 없다. 물론, 위에서 링크한 글 외에 추가로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보탤 수는 있다.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하는 게 이런저런 글을 읽는 것이며, 그런 과정에서 그의 글도 요즘 그럭저럭 읽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여기에서 말을 더 보태봤자 나의 의도와는 달리 인신공격이나 비난으로 받아들일 확률이 높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귀찮으며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보자. 본의 아니게 써 온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와 같은 맥락에 자리하는 글이다. 또한 ‘조리돌림’일 수도 있는 리트윗에 대한 화답이자 독자로서 매체에 던지는 제안이기도 하다.
트위터 이야기로 운을 떼었으니 조금 더 늘어놓아 보자. 야구 뉴스를 많이 읽다보니 최근 트위터에서 불거진 경향-또는 논쟁-을 하나 주워 건졌다. 바로 ‘누가 뉴스를 처음 알렸나(who breaks the news?)의 문제다. 특히 스토브리그 기간에는 자유계약 선수의 거취나 트레이드 때문에 ‘특종’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요즘은 이걸 트위터에서 많이들 알린다.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소식을 알린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관심사로 떠오를 때가 있다. 경향은 첫 번째 이후로 알리는 사람이 ’00로부터 알았다’는 문구를 덧붙이는 쪽으로 간다. 가끔 트위터에서 관심 가는 뉴스나 정보의 링크를 보면 다시 트윗하면서 제공한 이의 아이디를 덧붙이곤 했는데, 그게 바로 그런 시도를 보고 따라해본 것이다. 어차피 나는 뉴스의 최초 발견자가 열정적인 수집가(collector)가 아니므로, 그걸 제공한 사람에게 공이든 뭐든 돌려야 공정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 황희 정승은 아니지만 그 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관건은 뉴스 전달 매체로서 트위터의 속도와 역할이다. 인터넷만 된다면 이보다 더 빠른 매체가 있을까? 난 SNS의 일반 사용자에 불과하니 모르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할 거라 생각하지만, 현재 나의 생각이 닿는 영역 안에서는 없다. 인터넷만 터진다면 가장 먼저 소식을 전달할 수 있다. 링크도 함께 제공할 수 있으니 140자 내에서 핵심 뉴스는 텍스트로, 자세한 설명은 링크로 웹페이지에 연결해주면 된다. 어차피 사람들은 이제 트위터 140자 안에 담을 수 없는 정보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김연아 열애’를 예로 들자면, 물론 다들 미친 듯이 관심이 많으니 링크를 눌러볼 가능성도 높지만 웬만하면 ‘김연아 열애’의 다섯 글자로도 핵심은 파악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김연아가 열애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거기에 ‘상대는 000’의 여섯 글자만 덧붙일 수 있다면 분명 링크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다. 며칠 전에 주워들은 것인데 뉴스를 소프트웨어가 쓸 수 있는 기술도 나왔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불가능할 수가 없다. 의견이 담기지 않은 ‘스트레이트’한 기사라면 굳이 사람이 쓸 필요가 없다. 어쩌면 사람이 쓰는 것이 낭비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런 시대가 도래했다.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스트레이트한, 웹페이지에 담아야만 하는 뉴스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중요한 건 시각, 즉 ‘perspective’다. 나를 포함한 건축전공자에게 perspective는 또 다른 의미에서 친숙하다. 2차원의 종이에 3차원 공간을 시각적으로 표현(represent)하는 기술 또는 양식과 그 결과물인 투시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따져보는 건 나의 전문이 아니지만, 찾아보면 1400년대 건축가 브루넬리스키가 기하학적인 방법론을 처음 제시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교육을 하는지 잘 모르지만, 건축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또는 혼재)하던 1990년대 중후반에는 2차원 정보인 평면을 받아 손으로 투시도를 그리는 과정을 꼭 거쳐가야만 했다. 실행은 다소 어렵지만, 원칙은 간단하다. 핵심은 관계의 설정 및 파악이다. 가상의 눈이 2차원 평면에 담으려는 3차원 대상을 본다. 가상의 눈의 위치, 높이, 각도, 3차원 대상이 놓인 가상의 지평선에 무한수렴하는 가상의 소실점(vanishing point) 사이를 연결하면 그 중간 지점에 상이 맺힌다. 소실점인 고정이므로 눈의 위치나 높이, 각도에 따라 2차원에 맺히는 상의 형태는 달라진다.
소실점이 없거나 네 개인 투시도도 존재하지만, 현실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투시도는 소실점의 개수에 따라 나뉘어 세 종류다. 한 개의 소실점에 기대는 1소점 투시도는 실내 공간의 표현에, 2소점 투시도는 일반적인 건물 외관의 표현에, 3소점 투시도는 흔히 ‘조감도(bird’s eye view)처럼 위나 그 반대인 아래에서 본 고층 건물의 외관을 표현하는데 가장 많이 쓴다.
어차피 2차원에 3차원의 공간을 모사하기 위한 기법이므로 왜곡은 필연적이지만, 그래도 가장 왜곡이 적은 2점 투시도가 현실 세계를 표현하는데 가장 많이 쓰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를 세계를 표현(representation: re+presentation)하는 시각을 향한 일종의 은유로 읽는다. 두 개의 소실점을 지닌 2차원 투시도가 현실 세계를 가장 균형있게 표현하듯, 균형잡힌 시각으로 글을 쓰는데도 두 축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축은 ‘객관성의 확보’라는 목표 아래 사실 하나의 다른 두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 객관성의 확보는 외부를 향한 것, 즉 ‘사실 확인’이다. 나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사실이 존재하는가? 혹 나의 주장에 반하는 사실이 존재하므로 더 이상 타당성이 없는데도 무리하게 밀어붙이지는 않는가? 한 발 더 나아가 나의 주장에 타당성을 불어넣기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는가? 이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 두 번째, 즉 내부를 향한 객관성의 확보다. 얼마 전 트위터에 ‘판옵티콘’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는데, 그 핵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시각 또는 주장을 빚어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각을 담는 과정에서 자신을 향한 객관적 평가와 비판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라는, 다소 거창할 수도 있는 주제로 글을 몇 편이나 쓴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로운” 매체의 출현이었다. 이미 속도는 트위터 같은 매체를 따라잡을 수 없으므로, 뉴스 매체의 사활은 이제 시각에 대한 믿음을 독자로부터 사, 꾸준한 트래픽을 이끌어내는데 달렸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1차 뿐만 아니라 뉴스의 2차적인 생산, 즉 ‘큐레이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특히 음식에 관련된 트위터 계정 가운데 하루 종일 관련 뉴스만 올리는 것들을 보는데, 일정 수준의 트래픽을 끌어오는 수준 이상의 영향력은 없다고 본다. 중요한 건 그 뉴스 자체라기보다 선별의 과정과 사고, 그를 뒷받침하는 시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뉴스페퍼민트’같은 사이트가 인기를 얻는 것 또한 같은 이유다. 번역문을 제공하므로?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특히 저 사이트가 인기를 얻는다면, 그건 사람들이 뉴스를 선별하는 시각에 믿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의 중요성은 결국 이전 글에서 전업으로 살아 남으려면 꼭 갖춰야 할 ‘세계관’의 확보와 다르지 않다.
시각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런 글을 보자. 허핑턴포스트는 ‘하이브리드 매체’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이는 자신들이 생산하는 뉴스 뿐만 아니라, 그 울타리 아래 모여 있는 블로거들 또한 똑같은 비중으로 자신들의 시각을 향한 믿음의 구축에 공헌한다는 주장이나 다름 없다. 그러할까. 정말 이러한 글이 그런 역할을 할까. 그는 ‘허핑턴포스트 코리아가 제공하는 블로그는 네이버나 이글루스와 마찬가지다’라고 밝혔는데, 서비스의 브랜드 가치가 사용자에게 직접적인 권력이랄지 정체성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허핑턴포스트와는 달리 부정적으로 작용-‘네이버 (파워)블로거’의 사회 및 집합적 인식을 생각해보라-하는 블로그 서비스에서조차 이런 글은 소위 말하는 ‘메인’에 올라올 수 없다. 시각은 물론이거니와 내용도 없는 이 글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 인터넷 시대의 ‘뉴스’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상사 때문에 괴로웠던 직장인’, 즉 어른의 글이라는 것조차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개인 블로그에서조차 감정 담긴 ‘저격’은 추해보일 수 있는 마당에, 이것이 어떤 매체를 대표하는 하나의 의견인 것처럼 버젓이 올라올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한편 ‘감정과 저격’의 문제라면 이러한 글도 마찬가지다. 시각도 있고 십분 양보해 내용도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매체의 딱지를 굳이 달아야만 하는 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빵 대신 브리오슈’처럼 ‘글 대신 그림’도 있고, 채식주의자도 크게 할 말 없는 세상에 ‘채식”지향”주의자의 선언문도, 그것도 재탕으로 올라온다(혹시라도 돈 받고 쓴 것과 같은 주제의 글을 다른 매체에 올린다면 최소한 다시 쓰는 것도 “글 쓰는” 사람의 예의이자 기술 아닐까.). 이 밖에도 많은 글들이 시각 또는 내용(최소한의 분량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측면까지 감안할때), 또는 그 양쪽 측면에서 모두 함량 미달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 허핑턴포스트가 아닌 우리 사회 거의 전반에 흐르는 밀도 부족의 문제이므로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솔직히 이런 문제에 글을 몇 편이나 자발적으로 쓰리라고 생각 못했다. 매체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없고, 나 아니고도 허핑턴 포스트의 문제에 대한 글을 쓴 사람들은 많다. 그러므로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이 많이 겹치리라 생각하는 가운데, 이런 부분을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다. 486의 폐해를 그 아래 세대들이 많이 지적한다. 생물학적, 지정학적으로 부득이하게 그 일원이 되어 나도 그 주장의 많은 부분에 공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아래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내 또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드라마 <종합병원>이 한참 사랑을 받던 시절, 사람들은 ‘X세대’라는 딱지를 즐겁게 가지고 놀았다. 20년 뒤, 나를 포함한 그 X세대가 기성세대의 울타리에 발을 들이는 지금 그들의 몰골은 싫어하는 486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더 나쁘다. 어쩌면 한국인으로서 원죄나 천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패거리 문화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그 위에 대학시절 활성화되기 시작한 배낭여행 등으로 싹튼 라이프스타일, 또는 취향의 껍데기를 씌웠다. 486 패거리 문화의 원동력이었던 운동권 정신은 그 자체로 어차피 집단주의 성향을 보장해주지만, 그 아래 X세대의 취향은 외관상 개인주의를 담보하는듯 보이면서도 그 취향 자체가 한 곳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므로 사실은 집단적이고, 따라서 더더욱 가식적이며 또 “위험”해보인다. 달리 말해 그들은 스스로를 ‘차별화가 가능한 개인’이라고 믿지만 뜯어보면 사실은 더더욱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집단의 일원으로 존재하며, 그러한 경향이 저러한 뉴스 사이트의 등뼈에 486과 교묘하게 결착되어 있다. 이런 일이 있기 전, 나는 우연히 편집장의 타임라인에서 ‘속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는 사람은 이상하다’와 비슷한 요지-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의 트윗을 본 적 있다. 글쎄, 사람에 대한 믿음을 품는 건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또한 분명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영역을 구분할 수 있어야 믿음과 그 믿음을 향한 희망도 빛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게, ‘다 자란 어른’의 필요충분 조건 가운데 하나다. 자라지 못한 어른이 이다지도 많은 건, 전부 486의 억압 때문인가?
허핑턴포스트, 뉴스, 시각, perspective
# by bluexmas | 2014/03/17 11:11 | Media | 트랙백 | 덧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