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는 동네북인가
아이쿠,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 나도 안다. 고백컨데 원래 이런 제목과 그에 걸맞는 글을 쓸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처음 계획은 게임과 글 또는 책에 대한 글을 쓸 생각이었다. 발단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가 날린 트위터였다. 딱 2주쯤 되었으니 대부분 기억하시리라. 여기에 전말을 정리해놓았으니 즉각 이해가 가능한데, 한마디로 ‘책>게임’이라는 발언을 했다. 나도 그의 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데다가 며칠전 쓴 글에서도 말했듯 ‘뉴비’지만 게임을 즐기는 터라, 그의 발언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문제는 스스로도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 일반화였다. 분명 ‘어떤 게임은 개인은 물론 그 총합인 사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차라리 책이 낫다’라고 말했으면 오해의 소지가 없었을 것을, 분명 ‘책>게임’이라는 소지의 발언을 했다. 이후에도 ‘아 그게 사실 내가 감정적으로 발언했지만 사실 이렇다’고 해명했으면 간단했을 것을, 그는 자꾸 논란의 가지를 엉뚱하고도 쓸데없는 방향으로 쳤다. ‘실수였노라’고 말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터라, 꼭 저래야 될 필요가 있을까 궁금했다. 게다가 저 위에서 링크한 글에서도 밝혔듯, 이제 더 이상 책은 책이기 때문에 우월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있다. 책에서 비롯된 지식과 사고의 체계가, 그보다 훨씬 더 몰입 가능한 매체를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던 ‘애니팡’과 같은 단순한 게임에도 나름의 미덕은 있다. 약 30년 전, 친척 한 사람이 중동에 일하러 갔다가 말도 안되는 교통사고에 연루되어 아주 크게 다쳐 귀국한 사건이 있었다. 이제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는 2,3년 간의 입원생활을 겪었는데, 침대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의사들이 재활의 수단으로 권했던 것이 바로 닌텐도의 ‘게임 앤 워치’류의 단순 게임이었다. 그보다 몇 갑절은 더 복잡해진 이 세상에서, 그따위로 단순한 게임이 하등 도움이 되겠느냐고? 글쎄, 그건 아마도 각자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히려 그렇게 세상이 더럽도록 복잡하므로, 그렇게 말도 안되게 단순한 것이 구구절절이 필요할 때도 있다. 만원도 아닌 백만원 지하철에서 어젯밤 쳐마신 소주의 냄새를 가셔내지 않은 채로 출근하는 중년 남성의 옆에 착 붙어 열 정거장 가야 한다면, 나라도 같은 스마트 폰에서 리차드 세넷의 <장인>을 읽는 대신 그냥 애니팡을 하고 말 것이다. 인생, 별 것 있는가?
그러니까, 원래는 여기에서 끝나고 말 문제였다. 하지만 말한 것처럼, 나는 그의 책에 관심이 있었다. 사실은 주문하려던 참이었는데 까먹어서 반 정기적으로 주문하는 목록에서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 저 일이 일어나기 하루 전이었다. 다음날이 마침 주말이라, 시내에 나간 김에 서점에 들렀다. 직접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음에 들면 사야되겠다. 그것이 결국 오프라인 서점의 매력 아닌가. 직접 확인 후 구매. 그러나 일요일 저녁 나절 그 붐비는 서점 한 가운데에서, 나는 그 책을 집어 후루룩 넘겨보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어차피 돌려 말하기에 소질 없으므로 느낀 대로 대겠다. 그건 연구라고도, 책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단순하게 책의 ‘볼륨’만을 잣대로 삼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일 수 있다. 나도 충분히 안다. 그러나 비슷한 입장의 생산자에서, 또 학교에서 나름의 시간을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고 보낸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다. 연구가 일정 수준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밀도를 필수 조건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건 외부 맥락의 인증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연구를 하는 본인 스스로가 연구자로서 갖춰야만 할 내부 맥락의 인증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책은 나의 눈에 그저 본격적인 연구의 전제조건을 위한 안내서, ‘introduction’에 불과할 뿐이지, 일정 수준 완결된 연구의 결과물이라고 스스로를 규정지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어 보였다. 특히나 김난도 교수나 혜민의 베스트 셀러 표지를 나란히 박아놓은 쪽에 이르러서는 그저 실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왜? 사람들이 저 두 저명인사의 책 제목이나 표지 등등을 모를까봐 친절을 베풀고자? 책 표지를 함께 실으면 자신의 비판이 보다 더 설득력을 지닐 것 같아서? 239쪽. 책이 책이라고 하기에 참으로 민망한 수준이라 결국 저런 이미지까지 실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수록을 위한 승인은 누가 받았을까? 저자가? 편집자가? 책을 고이 놓고 서점을 나서며 그렇게 궁금증을 품었다. 말미에 ‘딱히 대안을 주지 못해서 더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참으로 비겁하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안이 그렇게 엄청난 것이어야만 하는가? ‘대안=희망’이어야만 하는가? 난 그저 ‘모르니 나눌게 없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대체 내가 왜 그의 책에 관심을 품었던가. 분명히 ‘차별’과 ‘찬성’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거기에 ’20대’라는 맥락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가만, 나는 왜 20대에게 관심을 품었나? 좀 더 생각해보았지만 속에서 딱히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몇몇 아주 특별하고 친밀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2전 연령대의 사람과 거의 왕래가 없으니, 그게 20대라고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으며, 더군다가 개인과 개인으로의 관심도 아닌, ’20대’라고 뭉뚱그려 지칭할만한 불특정 다수를 규정하려는 시도에 더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아, 이렇게 말리는 건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저자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일요일 저녁 치고 붐비는, 20대가 좋아하는 동네 한 가운데를 뚫고 가는 버스 안에는 의외로 20대라 추측할 겉보기 등급의 승객이 별로 없었다.
난 그래서 좀 궁금하다. 대체 왜 20대인가. 대체 20대가 뭘 어쨌다는 말인가. 최근 본의 아니게 룸살롱 방문이 페이스북에 인증된 신지식인 1호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용가리가 대체 뭘 어쨌다는 말입니까? 뭐 술주정이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물론 용가리의 민폐는 단순한 술주정 이상이었지만(물론 고층건물만한 괴물이 단순한 술주정만 부렸어도 심각한 문제였겠다만), 그걸 그대로 인용해다가 물어보고 싶다. 20대는 대체 뭘 한 걸까, 뭐 집단 술주정이라도 해서 사회를 마비에라도 빠뜨린 것일까.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비단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좀 이전에, ‘에세이’의 기준에 충실하게 주로 사변을 가지쳐 책을 쓰는 여자 작가의 트위터 발언을 본 적이 있다. 어딘가에 강연을 갔는데 부모들이 이 세대 아이들에게 해줄 말을 요청해서 ‘할 말 없으며 미안한 마음 뿐이라 말이나 글로 언 마음을 만져 주는 수 밖에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취지나 인간성을 이해 및 수용하는 것과 별개로 그런 의구심을 품었다. “말이나 글로 언 마음을 만져준다”는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글을 쓰는 사람이니 자신의 책을 20대에게, 그냥 주는 것은 고사하고 할인 판매라도 하겠다는 의미의 표출인가? 수능시험 이후 신분증을 주면 햄버거 10% 할인해주듯, 주민등록증 보여주는 자신의 책을 10% 추가할인이라도 해서 살 수 있다는 의미인가? 그리고, 대체 동정의 냄새가 풀풀 나는 이 역학관계는 대체 누가 규정 또는 가정한 것인가? 아아, 알겠다. 케케묵은 대한민국의 문제가 썩고 썩다못해 터져서 크나큰 사회 문제가 되었고, 그걸 20대가 옴팡 뒤집어 써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치자. 그게 기정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 연령대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동정 따위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도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위에서 언급한 두 경우는 양반이다. 며칠 전에는 그보다 더 말이 안되는 이야기가 매체에 나왔다. 인용하자면 “좆같은” 커피를 전국 방방곡곡, 하다못해 통영 나폴리 모텔에까지 퍼뜨린 장본인의 글이다. 한마디로 요약할만큼 단순하다. ‘젊은이여, 도전하라. 창업하라!’ 그래? 일단 그 “좆같은” 커피 좀 제대로 바로잡고, 매체에 불거져 나오는 그 온갖 부당한 거래 사례들 좀 바로 잡고 말하는 건 어떨까, 싶었다.
본의 아니게, 그러니까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기성세대 반열에 접어든 내가 이 현실을 한없이 역겹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렇다. 개인이 안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대상들이 대상으로 삼는 ’20대’에는 일단 확실히 개인이 없으며, 그런 담론을 펼치는 사람들조차 스스로를 개인이 아닌, ‘특정 세대의 구성원’쯤으로 전제한다. 이유가 어쨌든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가 <애니팡>과 <데드 스페이스> 프랜차이즈를 구분 못하고 뭉뚱그려 “게임”이라 칭한 것이 문제이듯, “정규직 전환을 공짜로 바라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20대”가 전체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문제다. 대체 개인으로서 개인을 바라보는 시각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또 다른 이유는, 소위 ’20대 담론’이라는 것이 결국은 팔아먹기 위한 지적인 선정주의는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며칠전 박근혜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 운운하자 노정태는 ‘결국 한국의 정치세력 중 거의 대부분은 북한을 ‘잡아먹어야 할 돼지’쯤으로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라는 발언을 했다. 문화컨텐츠라면 뭐든지 ‘문사철’의 껍데기를 씌워야 더 잘 팔아먹을 수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20대 또한 결국 비슷한 맥락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정체된, 막말로 ‘앞길이 가로막힌’ 20대를 두 번 죽이는 것은 아닐까? 일터에서는 말도 안되는 임금과 비정규직이라는 장치로, 또 밖에서는 감정과 이성의 당의를 입힌 담론과 그 대상으로 도마에 올려 놓음으로써? 과연 그들의 연구가, 글이 정말 그 대상인 20대에서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궁금하다. 이 빌어먹을 위로와 힐링과 창업과 도전의 병신 같은 시대에 당신은 비겁하게 어디에서 세대의 가면을 쓰고 뒤에 숨어서 스스로 그렇다고 믿는 불특정 다수를 향하고 또 위한 담론을 배설하고 있는가.
우리는차별에찬성합니다, 오찬호, 게임, 책, 20대, 20대개새끼론
# by bluexmas | 2014/01/10 18:04 | Media | 트랙백 | 덧글(16)
비공개 덧글입니다.
비공개 답글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소개하신 소설 <영원한 이방인>, <도자기 박물관>은 여기서 포스트 보고 사서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라는 간단한 도식을 봐도 이 양반이 청년세대를 진심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정의의 수호자 기믹으로 꼰대노릇 하는데 더 관심이 많다는걸 보여주는게 아니겠습니까. 물건 팔아먹는게 추악하다는 고리타분한 논리는 대체 어디서 배운걸까요. 마치 상업을 말업으로 여긴 조선시대 선비를 보는 느낌입니다.
이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분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사회과학에서는 저런 연구가 쌓여 어떤의미가 될 수 있기에, 굳이나서 옹호하고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학은 도움되는 말 뭐 아무거나 씨부리면 되는 학문이 아닙니다. 물론 의미를 주고 물음을 던지는 게 중요하다지만, 적어도 박사논문에서 치밀한 논증이 결여되어 있다는 건 말이 안되죠. 자기 수업 듣는(그니까 엄청 편향되어 있는) 겨우 8명 인터뷰해놓고 20대의 정신상태를 규정한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저만의 비판이 아니라 그 분 박사논문을 읽은 다른 논자가 지적한 것이기도 합니다(그분 논문 각주에 나와있죠)
“힐링힐링,하며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책들보다는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발하는 것을, 누군가는 수고를 들여 그런 역할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블로그에 써 제끼는 글이랑 박사논문을 책으로 만든 것과는 수준이 달라야 합니다. 그 논문은 방법론에서 완전히 잘못되었고, 엄청나게 편향된 시각으로 20대를 바라보고 있죠.
“책을 책이라 부를 수 없다고 하시는 말씀에는 동의하기어렵습니다. ‘책’에 대한 (암묵적인) 개념정의가 비평가라는 책무에 기인한 이유에서인지, 자기위주이고 다소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게 왜 자기위주이고 편협한지 “정당화”를 하셔야죠. 책이라고 다 같은 책이 아닙니다. 어떤 수준에 미달했다는 뜻이죠. 비평가는 자신의 기준과 판단으로 책의 가치를 재단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게 맘에 안든다면 님도 근거를 들어 그 책이 왜 괜찮은지 정당화를 하시면 됩니다.
“사회과학에서는 저런 연구가 쌓여 어떤의미가 될 수 있기에”
-> 아무 연구나 쌓인다고 어떤 의미가 되는 게 아닙니다. 질 좋은 연구가 쌓여서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용이 되어야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단연컨대 그 책은 사회학자들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나 읽히고 말 수준의 책입니다.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나 일반인인 한윤형의 책들보다도 수준이 떨어져요. 제 말 못믿겠으면 한 2-3년 즈음 후에 이 책이 어떤 사람들에게 인용되는 지 한번 찾아보세요. 아마 전문 연구자들은 이 책 안 읽을 겁니다.
1. 연구, 당연히 의미있습니다. 다만 여러가지 측면에서 함량 미달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연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누군가 수고를 들여 그런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것” 맞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으로 제 일을 합니다. 그 수고가 부족하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세대와 사회를 관통하는 연구의 결과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 “수고”의 판단은 일단 소비자, 즉 독자인 저에서 비롯되어 생산자, 즉 저자로서의 저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비슷한 입장에서, 즉 학교에서 연구 지망생이었던 제가 다리를 놓았습니다. 전 우리나라에서 현재 나오고 있는 책들의 밀도에 집합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책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입니다. 따라서 “편협하다”라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한 비평가로서의 제가 나서서 목소리를 낸 것도 아닙니다. 저는 좋은 책을 읽고 싶은 독자고, 그 욕구가 확장되어 책을 씁니다.
2.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자가 게임 전체를 문제 삼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트위터 멘션을 정리한 것조차 링크시켜놓았는데, 읽지 않으셨는지요?
3. 연구도 맨밥 퍼먹고 맨땅에 헤딩해서 하는 것이 아니죠. 먹고 살아야 합니다. 펀딩도 필요하고 책도 팔 수 있으면 좋겠죠. 다만 균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대학원에 있을때는 교수나 학생이나 “섹시한 토픽”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습니다. 펀딩도 잘 나오고, 박사 받고 학교 가기도 쉬운 한마디로 당시에 유행하는 그런 종류겠죠. 저자가 이런 연구에 있어 선구자인가요? 결과물의 질이 담보되지 않은 연구의 결과물이, 그것도 논문이 아닌 상업적 책의 형식으로 나왔다면 그 완성도에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글 쓰는 것, 연구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에게는 지적 엄정성,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논증이 필수적인 전제가되어야 함을 잘 이해하고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결여되었을 때, 많은 이가 도피의 수단으로 개인의 취향, 주관, 낭만, 감각, 의미같은 것에 기대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트윗링크해주신것 읽어보았고, 블로그운영하시는 분글도 잘 읽었습니다. 블로그와 책을 통해 평소 가지신 태도에 대해 많은부분 옹호합니다.)
지적해주신 부분들,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