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묵은 봉투를 버리며
10년 묵은 일기장에는 뭔 구질구질한 이야기가 사람을 향수에 젖게 만들지 모르겠지만, 10년 묵은 봉투에는 그런 거 없다. 그냥 스스로의 미욱함을 한없이 꾸짖도록 만드는 구매욕과 우유부단함 등등만을 끊임없이 발산할 뿐이다. 어찌하여 이걸 거기에서 여기까지 가져와서, 또 두 번 이사하는 동안 묵혔다가 이제서야 버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런 봉투가 있었다. 공과금 등을 수표로 보낼때 계좌 정보 등이 비치지 않도록 안에 무늬가 찍혀 있는 “보안” 봉투다. 아마도 코스트코에서 ‘아 그래, 공과금 보낼때마다 봉투 사기 귀찮으니까 그냥 뭉테기로 사자”라는 생각에 샀을텐데, 예상만큼 열심히 쓸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공과금 고지서는 전용 봉투가 딸려오는데다가 봉투를 산 이후 자동이체나 온라인시스템으로 전환해서 더더욱 쓸 일이 없어졌다. 한 달에 다섯 종류의 공과금 보내는데 열심히 썼더라도 100개월, 즉 8년 정도 걸려야 다 쓸까말까한 것이었으나 저런 변화 속에서 한 100장쯤 썼는지 모르겠다.
보시라. 이렇게 많이 남았다. 더 큰 문제는, 짐을 정리할때 과감히 버렸어야 하는데 아아, 쓰지도 않은 물건을 버린다는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모두 잘 알 것이다. 그래서 그걸 또 꾸역꾸역 싸가지고 왔다. 뭐 우리나라에서도 봉투는 봉투니까. 그러나 봉투가 봉투지만 또 그렇지 않은 건 일단 규격이 다르고, 또 뭔가 봉투에 담아서 보낼 일이 요즘 있느냐는 것… 그리하여 이사 두 번을 하면서까지 서너장쯤 쓰면서 묵힌 봉투는, 그 세월 동안 습기를 열심히 먹어 내용물없이 봉한 봉투가 되어 이제 폐지가 되었다는 슬픈 사실. 오늘에서야 재활용 쓰레기 수거일에 과감히 버렸다. 아, 10년 묵혔다는 걸 감안하다면 ‘과감히’라는 표현을 과감히 쓰기가 좀 그렇다. 내가 이렇다.
# by bluexmas | 2013/12/17 03:54 | Life | 트랙백 | 덧글(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