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비평-두 편의 글에 대한 자발적인 답변
나와 상관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문제에 대한 글을 두 편 읽었다. 나 스스로 생각해봐야할 문제라고 봐서 글로 정리해본다.
1. 평가와 입맛, 맥락의 문제.
결국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한데, 음식을 비롯해 모든 평가의 문제는 “오롯이” 주관의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결정은 주관의 영역에서 내리는 것이 맞지만 그 영역을 구성하는 요소는 객관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늘 간과한다. 평가가 가능한 모든 분야, 또는 문화의 곁가지에서 ‘그러나 내가 재미있게 보았다’라는 주장이 개인의 기호표현으로는 의미를 지니되 평가로서는 그보다 의미가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평가를 내리는데 동원한 지식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음식이기 때문에, 삼시세끼 먹기 때문에 ‘저절로 배운다’거나 ‘그러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그에도 또한 동의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단지 먹는 행위 바깥의 과학기술과 지식, 그리고 연구를 총동원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예로 라면을 든다. 모모푸쿠는 실패를 거듭하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술마시러 갔다가 뎀푸라 튀기는데서 면 가공의 원리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도 과학과 기술의 힘을 입은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라면은 어떠한가. 혹자는 가공식품과 식품첨가물이라면 치를 떨 수도 있겠지만, 그 한 봉지의 스프에 가짜든 진짜든 그만큼의 맛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 또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연구로 가능하다. 농심이 라면업계 1위인 것도 스프 숙성의 노하우 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여간 오늘날의 음식은 대개 이런 접근으로 만드는데 다만 소비자가 인식을 못하거나 하려들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가 엉뚱하게 가치를 쳐서, 지식의 축적 및 연구에 의존하지 않는 어설픈 자영업자가 등장해 기업체에 저항하려다 폭망할 뿐이다. 음식 또한 문화는 물론 학문의 곁가지로서 연구대상이 되어 왔고, 그 결과물도 이미 자신의 식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을만큼은 존재한다. 스스로 의미있는 생산 혹은 소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유의지에 기대어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주관과 객관의 문제는 그만하면 됐고, 맥락 이야기를 하자. 주로 돈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다. 다른 재화도 그렇지만 음식도 쌀 수록 질이 낮아진다. 따라서 싼 음식이 맛없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싼 음식의 평가 자체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 맞는 맥락을 적용해서 들여다보아야 할 뿐이고, 그게 음식 자체를 평가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외식의 품격>을 쓰면서 참고했던 에드 르바인의 <Pizza: A Slice In Heaven>에는 편저자인 그가 프랜차이즈의 피자를 평가하는 글이 담겨 있다. 참으로 간단하다. 미사여구를 동원했지만 그냥 맛이 없단다. 당연히 브루클린 다리 밑의 마르게리타 피자보다는 맛이 없을텐데 평가는 왜 하는 걸까? 둘은 다른 맥락에서 만드는 다른 음식이다. 한 울타리에 넣고 ‘피자’라고 퉁쳐서 평가하려면 불가하고, 그렇게 해야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왜? 저것이 소위 말하는 음식필자, 평론가의 영역 표시라고 생각하니 동물들이 오줌싸는 것처럼 지린내가 풍기는 듯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보자. 6,7000원짜리 서울시내 밥집에서 조미료 안 쓴 음식을 기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결국 단가에 수렴하는 노동력 자체가 가공하지 않은 재료로 두터운 맛 내기에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미료를 쓰지 않았다고 ‘착한식당’이라 딱지를 붙이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럴 수 밖에 없음을 기정사실로 인식하고, 더 다양하게 상황을 쪼개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조미료’만’ 썼는가/조미료’도’ 썼는가가 될 수도 있으며, 다른 요소의 완성도까지 두루 볼 수도 있다. 그런 부분까지 보는 단계에 이르면, 결국 맥락을 본다는 건 어느 정도 사람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은 결국 사람이 완성하는 것, 이제는 시간과 노력(결국은 돈)을 아낄 수 있는 수단이 맛을 볼모로 잡고 얼마든지 존재한다. 거기에 얼마만큼 기댈 것인가? 100에서 0까지, 선택의 폭은 끝없이 넓다. 100은 그냥 장사꾼이 될 것이며, 0은 바로 망하기 쉬운 헛수고일 것이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생산자의 몫이자 선택이며, 그건 결국 다시 지식과 기술, 연구의 문제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는다.
2. 사람과 수준의 문제
사람 이야기를 꺼내면 자연스레 내가 어제 읽었던 두 번째 글에 대한 대답으로 넘어간다. 내 책에 관한 평가를 남긴 어느 블로그에서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아직 외국 수준에 못 미치니 그를 감안하고 먹어야만 하는데 전혀 그 고려가 없는 것 같다’는 주장을 읽었다.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눠서 대답할 수 있다. 일단 수준이 떨어지는 부분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특히 재료가 그렇다. 아직도 우유 요거트나 다름 없는 “사워크림” 한 종류만이 팔린다. 빙산의 일각이고 꼽자면 끝도 없다. 하지만 이는 피해갈 수 있는 문제다. 양식에 100% 걸맞는 재료가 없어서 양식을 (잘) 못 만든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다. 기본 음표 몇 개만 가지고 셀 수 없이 많은 음악이 나온다. 음식은 그보다 더 많은 재료로 만들 수 있다. 그 간극이 존재한다면 메우는 것은 사람의 몫이며, 이를 못하는 것이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수준이 떨어진다’라는 주장을 펼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좁게 보았을때 내 얼굴에 침뱉는 것이나 다름 없으며, 넓게 보았을때 사람이 당연히 사람에게 품어야만 하는 희망을 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음식에 만연한 문제는 비단 양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음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원인은 결국 한탕주의와 대강주의라고 본다. 그 문제가 설사 만성적이고 고질적이라고 해도, 수준의 문제라고는 볼 수 없으며 난 그러기를 거부한다. ‘우리나라 양식이 맛없으니까 돈 아깝고, 따라서 난 그 돈 아껴서 외국에 가끔 나가서 먹어야지. 역시 수준이 떨어져.’라고 말해봐야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결국은 자신의 수준마저 함께 깎아내리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열 군데 가운데 아홉 군데가 기본의 기본도 안 지키는, 지극히 인간차원의 태만에 기댄 음식을 낸다고 해도, 어디에서 누군가 하나는 자신의 120%을 바쳐 음식을 만든다. 물론 그래도 좋은 음식이 나오리라는 보장은 절대 없다. 하지만 그걸 찾아가 맛을 보고 접시에 담긴 노력과 그 원동력인 의지를 읽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결국은 비평의 목표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음식의 역할 및 기능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가 음식과 그 문화를 소중하게 여겨야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 by bluexmas | 2013/12/06 16:56 | Taste | 트랙백 | 덧글(5)
단지 식도락을 즐기는 식도락가 입장에서 -음식에 대한 큰 깊이 있는 지식이 없는- 음식에 대한 포스팅을 할 때 표현 범위에 대해서 상당한 고민이 있습니다. 깊은 이해가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요, 순수 아마추어적인 입장에서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음식에 대한 포스팅을 해야하는지 상당한 고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곰탕 국물을 놓고 논할 때, 실제 그 곰탕을 제조하는데 소요된 재료의 규모는 일정 하겠지만 평가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많은 재료를 우려내어 깊은 맛을 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반면에 재료의 양이 부족하여 그 부분을 조미료로 채웠다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저는 그 부분이 사실 너무 겁이 납니다. 엄청난 재료를 투입하여 정성스레 우려낸 곰탕이지만 조리의 문제 라던가 어떤 실수 등을 통해 결과물로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정 반대로 대충만든 음식이 어떤 식도락가의 간사한 입맛에 맞았을 경우도 있겠죠.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정답인건지. 그냥 내 의견이다 라고 마무리 하면 되는 것인지. 단지 먹는 걸 좋아하는 아마추어 입장이라면요.
어떻게 보면 모든 아마추어 블로거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