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화자
1998년, 처음 비행기를 탔다. 행선지는 미국 버지니아, 이민간 친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의 아버지가 종이를 내밀었다. 친구 동생의 대학 지원 에세이라고 했다. 잘 썼다고 소문이 자자하다며 한 번 읽어보라고 했다. 무슨 시를 인용한 에세이는 많이들 쓰는 큰 그림, 즉 늦게 이민 가서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세상을 떠난지가 몇 년 되었다는 친구의 아버지가 소감을 물었을때,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좋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어차피 옆구리 찔러 절 받는 상황 아닌가.
같은 이유에서 오랫동안 <Native Speaker>를 읽지 않았다. 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지레짐작했다. 이민자의 이야기. 나도 안다. 뻔한 이야기라고 말하면 누군가는 상처받을 것이라고. 각자의 이야기를 존중하지만, 독자로서는 흥미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사건들이지만 이제 너무 많다. 본의 아니게 진부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제목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어쩌면 의도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아이러니를 자아내려는 의도다. 이민 2세인 화자의, 말에 뿌리내린 정체성의 고민을 나는 그렇게 큰 것으로 읽지 못했다. 한국말을 잘 못하지만 그런 스스로를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아니면 내가 스쳐 지나간 이민자들보다는 오히려 덜 얽매인다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의 현재에 대해 부모가 못마땅함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어쩌면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 자체가 말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정체성일 수도 있다. 절제나 억제, 또는 담담함도 될 수 있다. 그걸 (본의 아니게/어쩔 수 없이) 물려받았으므로, 말과 그것에서 비롯된 정체성을 큰 문제 삼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절제든 억제든 담담함이든, 이런 화자를 좋아한다. 이왕이면 담담한 게 가장 좋다. 어떤 경우에도 감정의 물 아래 담긴 모든 걸 다 보여주지 않고, 사건사고가 흔들어놓더라도 평정심을 유지하되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물음표나 느낌표보다는 보다 더 이성적이고 치밀한 말로 또박또박 늘어놓는 화자가 좋다. 다 읽고 나니 서사보다는 화법, 또는 문체에 이끌려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아한 문장이었다. 길이로 완급을 조절하고 때로 운까지 맞추는 솜씨가 탁월했다. 그러한 완급 조절 속에서 하나의 사건이 다음 차례에게 바통을 넘겨줄때 때로 전율을 느꼈다. 심지어 운까지 맞는 부분도 있었다. 단어도 훌륭했다. 물론 외국인의 입장이지만, 외워서 익힌 단어 다르고 말하고 글 쓸때 쓰는 단어가 다르다. 글에 쓸 수 있으면 뜻은 물론 뉘앙스까지 완전히 익힌 것이라고 여긴다. 완전한 내것이다. 그런 단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영역이랄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소설이 좋다. ‘여태껏 안 읽고 뭐했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생산자의 입장에서는 무장해제시키는 소설이 좋다. 아무런 토 달지 않고, 그야말로 ‘가드 내리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는 소설이 좋다. <네이티브 스피커>는 그런 소설이었다. 반쯤 읽었을때 트위터에 그런 말을 했다. 소설 번역은 또 다른 큰 산이므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은 읽으면서 번역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다 읽은 지금, 충동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하다.
* 다음 책은 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 by bluexmas | 2013/05/25 01:46 | Book | 트랙백 | 덧글(6)
할리가 아무리 한국말을 잘해도 평균적인 한국인들만큼 한다고 해도 실제로 문학이나 골치아픈 서술 구조를 가진 문장을 만들어 내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고
그것은 반대로 몇십년을 영어로 생활하지만 여전히 영어가 외국어로만 다가 오는 저같은 사람은 영어로 글을 써도 늘 수많은 문법적 오류와 어색한 표현들로 가득한 이상한 글만 만들어 내더군요.
그래서 사전없이 영어책 줄줄 읽는 한국 사람들 보면 참 부럽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