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적 근황
1. 오후에 잠시 낮잠을 청했는데 메일이 왔다는 전화 알림 때문에 깼다. 열어보니 예전 회사에서 한 팀이었던 적이 있던 인도 녀석이 ‘야 나 지금 인도에 있는데 마누라가 피츠버그에서 일하게 되어 거기로 다시 갈 것 같은데 뭐 그 동네에 일자리 아는 사람 있남?’이라는, 수신인 50명쯤 되는 단체 메일을 보냈다. 애틀란타에서 회사 다니다가 잘린 사람들한테 그것도 만 4년도 더 지나서 단체 메일 보내서 그런 거 물어보면 누가 ‘어 나 아는 사람이 피츠버그에 있는데 뿌잉뿌잉 ‘ㅅ” 그러면서 친절히 답변해 주냐? 아무 일도 아닌 사건사고 같지만 이게 요즘의 내 분위기를 설명해준다. 연락오는게 죄다 이렇다.
2. 지난 주엔 카드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원래 거의 안받는데 마침 뭔가 물어볼 일이 있어서 받았다. 젊은 처자가 녹음기처럼 빠르게 그러나 숨은 가쁘게 ‘손님최근포스해킹으로인한데이타유실로인해사용하지않은해외실적이나는사고가있아오니저희가사건사고방지를위해해외사용을미리차단시켜드리려전화드렸습니다헉헉….’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싶어 자세히 물어보니 내 카드도 아니고 ‘강서구에있는가맹점에서손님의카드정보가유출되는사고가일어나일부해외사용실적이나는경우가헉헉…’ 그러니까 염창동도 아니고 강서구 어디에선가 가맹점에서 긁은 카드의 정보가 유출되어 그걸 이용 해외에서 사용한 것처럼 돈을 뺀 사고가 벌어졌다는 얘기였다. 그런 사건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카드의 해외사용을 미리 막겠다는 것. ‘손님그게아니시라면아예새카드를발급해드릴수도있습니다헉헉…’ 이건 아니다 싶어 만일 그런 사고가 났을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대처하냐고 물었다니 ‘네, 손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쓴 카드의 수수료로 월급 받는데 어찌 그걸 모를 수 있느냐고 화를 버럭 내고 그 위의 담당자랑 통화를 요구했다. 곧 전화가 걸려왔는데 하는 얘기는 당연히 똑같다. 물론 멍청한 대처방안이다. 만약 카드 사고가 났다면 본인이 쓴 내역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카드 회사에서는 그걸 바탕으로 돈을 청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귀찮으니까 미리 막겠다는 것 아닌가? 분명 윗사람 지시일텐데…
3.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는다. 한창 살얼음판을 걸으며 간신히, 그러나 꾸준히 기분 좋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부득이하게 사람 만날 일이 생겨 나갔다가 근 일주일 가까이 다시 일을 손에 못잡는 일을 겪고 마음을 먹었다. 분위기 타는 거 싫고 그로 인해 안해도 될 말 하는 게 싫고 또 그래서 힘 빼는 것도 싫다. 봄은 거의 다 왔지만 나는 아무래도 겨울에 머물러 있어야만 할 것 같다. 내가 없어서 못 사는 사람은… 거의 없고 또 없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또 없어야만 한다.
4. 작금의 노쇼 고객 신상 공개 사건에 대한 기사에서 외식경영학 교수님이라는 양반이 ‘예약하는 손님에게 할인이나 디저트 무료 제공 같은 혜택을 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장치가 필요할 수는 있지만 궁여지책이여야만 하고 사실 안하는게 맞다. 수요 많은 건 혜택없이도 다 예약한다. 왜 공짜로 줘야하나? 기껏 교수라는 사람이 저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5. 어디 보니까 저 교수가 있는 학교 같은 프로그램에서 박사한다고 글 올린 사람(요식업 관계자)이 있던데, 일단 주먹구구식 조리법부터 스스로 돌아봤으면 좋겠다. 가르친다는 사람이 공부도 안 했는지 생선 지지면 육즙 가둔다고 말하거나, 기름이 핵심인 돼지 고기에서 그걸 다 떼어내고 ‘시원한 맛에 먹는다’고 말하는 건 아예 맛에 대한 기본 이해조차도 없는 것이다. 시원한 국물을 내려면 돼지고기에서 기름을 뺄 게 아니라, 멸치를 쓸 일이다. 돼지 앞다리 같은데서 기름 뗀 살코기는 퍽퍽하고 거의 아무 맛도 없다.
6. 커피에 대해 맛을 이야기하는 경향을 보고 있노라면 장님이 코끼리의 특징을 완전히 외운 다음 줄줄 읊는 것 같다. 온갖 형용사들을 읊는데 막상 마셔보면 그 맛이 안난다. 못 볶았거나 보관을 잘못했거나 오래 했거나 추출을 잘못했거나 좌우지간 말하는 맛이 안 난다. 그래도 잘만 읊는다. 그냥 무작정 외운거다. 심지어 온도계 놓고 내리는데 입천장 홀랑 까질만큼 뜨거운 걸 내놓는 곳도 있더라. 묻고 싶다. 커피가 뭐냐? 외국 로스터리 이름, 커피 원산지 같은 거 읊으려면 그만큼 노력부터 일단 좀 기울였으면 좋겠다. 물 온도도 못 맞추면서 무슨…
6-1. 커피로 예술하는 것처럼 읊어대면서 정작 빠바같은데서 빵 사다 대강 먹는, 지극히 자기 모순적 정제성의 부정.
6-2. 어딘가는 커피는 좋은데 받아오는 케이크가 그 ‘똥케이크’ 만드는 곳이더라. 격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진열장 보고 웃었다. 몽블랑과 밀푀유를 섞고 거기에 마카롱을 얹으면 뭐가 될까? 그냥 잡탕이 된다. 그런 건 신메뉴 개발이 아니다. 가장 평범하거나 고전적인 메뉴부터 아주 잘 만들어도 전혀 문제될 것 없다. 지금 결국 홍대에서 임대 사정 때문에 매장 없어진 그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은 ‘아니 왜 사람들이 바닐라, 딸기, 초코만 찾아요? “보링”하게?’라는 말을 꽤 열심히 하고 다니는 모양이던데, 그럼 혹시 몇백 년 된 클래식 음악을 아직도 사람들이 왜 열심히 듣고 연주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느냐고 묻고 싶더라. 그거 “보링”하지 않나? 아이스크림 한 20년 만들고 그러면 이해하겠다만…
6-3. 같은 맥락에서 ‘식사빵>간식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빵 만들지 말아야 한다. 단팥빵 제대로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게 얼마나 맛있는지는 아나?
6-4. 아 그래… 왜 아직도 대를 물려 바게트 같은 거 만들고 그래, “보링”하게? 대물려서 두부쯤 만드는 거, 그거 “보링”하지 않겠나? 배추김치 한 10년 담갔는데, “보링”해서 못 담그겠네 이제?
6-5. 마카롱 만들기가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쉬워서 그런 모양인지 케이크에 마카롱을 장식으로 얹는 곳이 많던데 케이크와 마카롱 둘 모두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7. 석달만인가 머리를 잘랐다. 분당 정자동까지 가는게 사실 생각보다 금방인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반증이리라. 분당에서 이전 한 번 거치면서 8년, 그 전에도 몇 년해서 정말 한 10년 가까이 찾아가는데 그만큼 오래 다녀서 그런지 ‘스탭’이 ‘디자이너’로 승진하는걸 한 1년 동안 세 명 정도 보았다. 이번에도 간만에 가니 한 명이 또 승진했다고 인사를 했다. 대견스럽다고 말하면 좀 아저씨 냄새 너무 나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보기 좋더라.
8. 언니는 내용없는 독설만 뱉다가 결국 매를 벌었다던데…
# by bluexmas | 2013/03/24 23:46 | Life | 트랙백 | 덧글(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