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에게 예의없는
아무래도 ‘동방예의지국’이다 보니 무슨 일이든지 일단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면 ‘이런 예의 없는…’의 카드를 꺼내 분쟁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일을 몰고 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거 참 예의에게 예의 없는 짓이다. 예의는 그런데 들먹이라고 있는게 아니다. 일 시키면 정한 돈 그대로 잘 주는게 예의다. 아무리 친절하고 따뜻하게 일 시켜봐야 돈 못주면 말짱 헛거니까. 뭐든 하다 안되면 자기 사업체 차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또 그런 사람들이 진짜로 사업체를 차려서 그런지 이게 돈 나오는 샘이 아니고 늪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 같이 끌여들여서 망한다. 예전 회사에서 아무 대책 없는 동포 한 분은 뻑하면 ‘아 뭐 이거 하다 안되면 장사해야지’라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자기 적성에 안맞는 일을 억지로 해서 잘 못하는 경우, 새로 찾은 일이 적성에도 맞아 더 잘하고 그래서 돈도 많이 버는 전화위복 및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A를 못해서 탈출구로 B를 찾으면 단지 그것이기 때문에 잘하고 돈 잘 버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학교+실무’로 한 15년 일했다면 그 사람은 설사 못하더라도 한 번도 관심없었던 치킨 튀기는 것보다 그 일을 잘할 확률이 높다. 새 일을 하면 새 세계가 열릴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또 다른 시궁창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쪽에서 구르는 대가가 저쪽에서 얻는 것보다 만족스러우면 다행인데 또 어차피 현실은 시궁창이다.
근데 정말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틀에 한 번 정도 밖에 나가는데 목요일에는 정말 멀쩡한 건물 구석에 담배를 피우면서 비교적 깨끗하고 아무 쓰레기조차 없는 바닥에 돛대를 꺼내고 빈 담뱃갑을 그냥 내동댕이치는 처자를 보았다. 그 처자를 보고 집에 오는 길에는 고등으로 보이는 미래의 꿈나무가 경쟁이라도 하듯 씹던 껌을 퉤! 대로변에서 멀리 뱉었다. 내가 중년이라 눈마저도 예의없는 애들만 골라보는 꼰대눈이 된 것은 다행스럽게도 아니다. 오늘은 교보에서 웬 노인네가 매대에 쌓인 책을 들어 침을 발라 넘겨가며 뭔가 알 수 없는 주문을 크게 외우는 장면을 목격했으니까. 아, 그리고 아직도 화장실에서 손 안 닦고 나오는 남자들 진짜 많은데 정말 노소 안 가린다. 현실이 이런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예의에게 예의없는 짓 같다. 동방에 있는 건 맞으니 뭐 그렇다쳐도. 사실 이렇게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사는데 모두에게 예의차린다는거 성인군자 코스프레하는 상황 아니면 곤란하다. 그러니 이제 동방예의지국이네 뭐네 자꾸 불가능한 딱지 붙여서 예의에게 예의없이 굴지 말고 이제 그냥 좀 생긴대로 살자. 우리는 전혀 예의 바르지 않다.
# by bluexmas | 2013/02/04 01:22 | Life | 트랙백 | 덧글(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