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먹은 순대
오늘 하루, 고향 나들이를 했다.
라고 말하니 뭔가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 고향이라는 데가 수원이니까. 다음 주부터 여름 내내 바쁠 예정이어서 치과에 다녀와야만 했다. 사실 좀 더 빨리 갔어야 하는데, 돌아와서 2년 동안 오산에서 왔다갔다한 게 너무 지긋지긋한 나머지 오산은커녕 수원조차도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꽤나 오랫동안 점검을 받지 않은데다가 불가피하게 불규칙한 생활습관 때문에 종종 관리를 제대로 못해줄 때가 있어서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는데, 의외로 상태는 나쁘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2호 요정님이 오래 전에 그만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무 시간이 지나서인지 1호 요정님마저 안 계셔서 꽤 섭섭했다. 모두 좋은 분들이라 다른 곳에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치아 행복을 위해 온정을 베풀어주시리라 생각하니 그래도 조금 마음이 가벼웠다.
스케일링을 마치고 순대를 먹으러 갔다. 다음 행선지가 분당이므로 치과가 있는 영통에서 가기 편한지라, 순대 한 접시를 먹으러 구시가지에 나갔다가 다시 그쪽으로 돌아오는 것이 여러모로 낭비라고 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그게 간만에 들른 고향에 대한 예의는 아닐까 싶어 낭비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지막으로 지동순대를 먹은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미국에 살았을때 들어왔다가 들렀던 것 같기도 하고, 오산에 사는 동안 한 번쯤 갔던 것도 같다. 어쨌든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순대의 맛은 놀랍게도 친숙했다. 그래서 순간 그 오래된 기억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도 싶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시장에 가는 건 내 몫의 일이었는데, 사실 어린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고 그저 순대 한 조각 얻어 걸리기만을 바랬던 것 같다. 때로 한 근 정도 사서 올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약 십 센티미터쯤 되는 순대 토막을 반으로 갈라, 거기에 고춧가루 소금을 반 숟갈 정도 넣은 걸 받아 먹는 선에서 그칠 때도 있었다. 기름진 순대를 뚫고 나왔던 짠맛이 아직도 기억난다.
몇 점을 거듭해서 먹자 이 친숙한 맛이라는 게 사실은 이제는 거의 어디에서나 똑같은 공장 순대의 맛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기억의 맛이라는 걸 그렇게 찾는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기억을 찾기보다 확인사살하기 위해 먹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던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머리가 복잡해져서, 막걸리를 한 병 시켰다. 오랜만이라 시도했지만,역시 허파는 취향이 아니었다. 막걸리를 시키니 단무지가 딸려 나왔다.
막걸리로 딱히 취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쓸데없이 너그러워져 순대와 머릿고리를 몇 꾸러미 싸달라고 했다. 앉아 먹는 동안 손님들이 머릿고기를 사가지고 가길래, 구걸해서 얻은 한 점이 그럭저럭 먹을만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이나 되니까 이걸 먹을만하다고 생각하지, 그 먼 옛날 명절마다 할머니가 직접 편육을 만드시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그것 말고 다른 편육에 입을 댄 적이 없었다. 돌아보면 사실, 그때도 그 맛을 잘 모르기는 했다. 다만 보다 더 특별한 때에 만드는 것에는 삶은 계란이 들어가 그 단면이 훨씬 더 보기 좋았던 것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제 그런 걸 보고 감탄하는 시기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어떤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테니 서운하지만, 그래도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들 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맨 첫 머리에서 언급은 했지만, 사실 나에게는 고향이라는 것이 그렇다. 모든 게 서울 위주인 우리나라 현실에서 사실 한 시간 내 거리에 있는 위성도시라는 것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누군가는 산으로, 또 누군가는 바다로 고향을 기억할텐데, 나는 그저 서울과의 어중간한 거리로 수원을 기억할 뿐이다. 그 나름의 인상적인 것들이 있겠지만, 그것들이 어중간한 거리에 압도당한다는 이야기다.
다시 영통으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는, 마치 한 이십년 만에 고향을 찾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택시기사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지동시장에서 성빈센트 병원을 지나 동수원 사거리에 이르는 길을 지날 때면, 정말 언제라도 이 길이 생각보다 짧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아홉 살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그 동네에 살면서, 지금의 구 시가지 한 가운데 있는 학교까지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지금은 거의 공동화되었지만, 당시 시내에 있던 그 초등학교는 구십 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존재였다. 왜 늘, 아홉살 짜리의 걸음으로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리던 동네에 살면서 그 시내의 학교를 다녀야만 했는지는, 아직도 나에게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나는 아니고 누군가가 그 건너편의 사립 초등학교에 들어가려고 추첨을 받았다가 떨어져 그랬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만, 언제나 그렇듯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고 속사정이라는 건 아무도 모른다. 사실 그건 뭐 중요하지도 않다. 언제나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이유는, 기억하기로 나의 소아비만 때문이었다. 정말 이제는 가물가물한데, 아마 차비도 받지 않았으니 걷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등하교길은 참으로 길었다. 실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도 하다.
그 길에는 그것 말고도 많은 기억들이 묻어 있지만, 이제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 그 기억들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떠올리기도 어렵다. 재작년인가 지나쳤을때, 성당은 이미 새롭지만 못 생긴 건물로 변해 있었고, 앞에 있던 그의 집 또한 너무나도 못생긴 다세대 주택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이제는 기억하는지도 기억할 수 없는 기억들이 차츰 늘어가고 있다.
분당가는 버스를 탄다고 말하자 택시기사는 나를 영통 입구에 내려 놓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타야하는 버스는 거기에 서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던 기사를 다시 끌고 다음 정류장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이번에도 자신만만하게 데려다준 그곳에서 또한 내가 타야할 버스가 서지 않았다. 그는 외국인 회사를 다녔는데 회화를 못해 정리해고되어 택시 운전을 하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그를 비난하고 싶으나 나도 정리해고자 출신인지라 자제하기로 했다. 이래저래 정리해고는 참 빌어먹을 일인 것만은 틀림이 없으시다.
# by bluexmas | 2012/06/02 01:58 | Life | 트랙백 | 덧글(10)
택시 타기는 역시 복불복이군요;;
저도 한 번 밀려났던 경험이 있는지라 더 안타깝네요.
매운거에 약해서 분식집 가면 떡볶이보다는 순대를 늘 먹었지요.
제가 먹었던 순대는 거의 다 공장제였지만, 순대는 늘 맛있었습니다. ^^
동생이 수원으로 이사를 가서 방문한 적이 있는데, 어떤 정류장에서 또 하염없이 사당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야 그 버스는 유령 버스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제야 버스 터미널로 향했죠.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에게 모르는 곳에서 버스 타기란 참….. 빌어먹을 일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