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노량진 수산 시장, 생대구 스튜

싱싱함이나 탄소 발자국 절감 등의 환경 친화적인 이유를 들어 점점 자신의 농장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는 셰프들이 늘어가고 있지만 전통적인 시장, 그리고 상인과 음식 만드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갈수록 분업화되고 복잡해지는 시스템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농장 또는 정원까지 가꿔가며 재료를 자신만의 재료를 수급하려는 셰프는 어쩌면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어제 새벽 노량진 수산 시장에 가봤다. 소매가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사실 노량진은 나같이 아주 적은 규모의 소매 소비자를 위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차가 정말 지옥같았는데, 웃기는 건 주차공간 아닌 곳에도 억지로 차를 대놓은 아랫층들과 달리 맨 꼭대기층은 완전 운동장… 어쨌든, 새벽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누 안끼치려 조심조심 한바퀴 둘러보고 이리가 가득 든 배불뚝이 생대구 한마리와 오징어 두 마리, 홍합 한 바가지를 사왔다. 직접 손질해볼까 하다가, 대구살은 단단하지 않으니 자칫하다가 난도질을 할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적당히 토막쳐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 입에 담배를 물고 칼질을 하는 ‘진구수산’ 사장님 아주 인상적이었다.

물을 자작하게 부어 홍합을 끓여 살을 발라 먹고, 남은 국물을 한 번 걸러 대구 대가리, 다시마와 마늘 몇 쪽을 넣고 약한 불에 은근하게 끓여 국물을 냈다. 그리고 그 국물을 바탕으로 대구 스튜를 끓였다.

애초에 고추장이나 가루 듬뿍 넣은 ‘칼칼한’ 탕은 내 취향이 아니고, 지리는 오히려 너무 심심할 것 같아 토마토를 바탕으로 한 스튜를 끓였다. 양파와 마늘을 볶다가 통조림 토마토를 더해 적당히 맛을 농축시킨 다음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방울토마토를 더했다. 대구 머리와 홍합으로 낸 국물을 더하고 적당히 끓이다가 대구 살을 먼저 넣고 국물이 배도록 끼얹어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리를 비롯한 내장을 넣어 살짝 익혀준 뒤 마무리. 먹기 직전에 파슬리-별로 좋지 않다-와 올리브 기름을 더한다.

그야말로 담백한 대구의 살이 카라멜화한 토마토의 단맛에 기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히 기우였다. 살도 살이지만 이리, 즉 정소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름지면서 ‘크리미’해, 모든 걸 압도하는 맛을 선사했다. 새우나 몇 가지 해물을 더하면 샌프란시스코에서 비롯된 생선 스튜 ‘치피노  cioppino’가 되는데, 이탈리아스러운 이름과 달리 이민 노동자들이 각자 있는 재료를 조금씩 더해(chip in)서 끓인 잡탕 스튜가 바로 치피노다. 밥보다는 바삭하게 구운 바게트가 잘 어울리는데, 역시 폴앤폴리나의 바게트가 최고였다. 퍼블리크의 바게트는 여느 베이커리들의 그것처럼 껍데기가 바삭하지 않고 질겼다.

참, 샌프란시스코의 ‘베뉴(Benu)’ 테이스팅 코스 가운데는 이리 튀김도 있었다. 그야말로 진한 바다의 맛. 너무 진해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by bluexmas | 2011/12/15 17:12 | Taste | 트랙백 | 덧글(20)

 Commented by 번사이드 at 2011/12/15 18:41 

대구 중심의 부이야베스에 가깝군요^^;

최근에 생대구탕을 먹어봤는데 정소가 정말 크리미했습니다. 좋은 대구 정소는 아구간 뺨치던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12/17 01:01

아구간과는 또 다른 크리미함인데 이게 결국 수컷에서 나온 거라 먹어도 되나? 싶었습니다…

 Commented by sf_girl at 2011/12/16 01:49 

“이리 튀김”이라고 쓰셨어요. 아이 깜짝이야!

 Commented by 애쉬 at 2011/12/16 10:51

이리(생선의 정소=白子(시라코))로 튀김하면 맛있어요 +_+)

복어 이리를 튀기는게 유명하죠

 Commented by sf_girl at 2011/12/16 12:12

아아 이리가 생선 부위 명칭이군요. 아우우우우우우우ㄹ 하는 그 이리인줄 알고 ;ㅅ;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12/17 01:01

그냥 이리 튀김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ㅅ’

 Commented by 애쉬 at 2011/12/17 02:08

임팩트가 있으려면

‘통’이리 튀김이 좋겠네요(-_- 아 떠올려버렸어;;;;)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12/23 10:58

새끼 돼지처럼 통 새끼이리구이는 어떨까요..;

 Commented by 애쉬 at 2011/12/16 10:53 

와…정말 맛있겠어요…

향신료 조합만 신경쓰면 정말 부이야베스랑 차이가 없을지도^^

정성스런 조리순서라…만들어 보자면 까마득한 느낌입니닿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12/17 01:02

다 만드는데 30분도 안 걸렸습니다. 별로 복잡한 과정은 아니에요. 부이야베스 생각을 못했네요.

 Commented by 애쉬 at 2011/12/17 02:12

손이 빠르시군요^^

밑 국물을 두가지나 사용하신 요리가 그 속도로 나왔다면 화구(스토브)를 세개나 두개 쓰신 듯하네요

민첩하고 유려하게 몸을 놀리시는 그림이 막 떠오르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12/21 01:05

손이 특별하게 빠르지는 않습니다. 아마추언데요 뭐^^ 국물 베이스는 미리 끓여뒀습니다.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1/12/16 13:29 

홍합 맛있겠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12/17 01:02

이상하게 별 맛이 없더라구요. 제가 좀 오래 끓여 질긴 탓도 있습니다만…

 Commented by Nine One at 2011/12/16 20:51 

토마토! 새로운 발상이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12/17 01:03

아닌데요? 토마토 스튜는 서양 음식에서 기본입니다. 딱히 새로울 게 없지요.

 Commented by Nine One at 2011/12/17 08:13

한국음식, 특히 저런 해물탕에는 고추가루, 고추장 이런 개념만 갖고 있다보니 답글을 저렇게 적었습니다. 서양음식에서 토마토는 기본이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12/21 01:05

네 사실 토마토는 채소니까요.

 Commented by 이네스 at 2011/12/17 17:21 

대구 이리는 좋아합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12/21 01:05

그냥 이리도 좋아합니다. 워우~~~-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