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보통의 여름
드디어 나의 세계로 복귀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새 모니터가 들어왔다. <북촌 방향>이 보고 싶어 외출하고 싶었는데 전화를 준다던 택배는 하루 종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일을 하다 좀이 쑤셔 여섯 시에 줄여야 할 청바지 두 벌을 주섬주섬 챙겨 나갔다. 한 시간 조금 못 걸려 목적지에 막 도착하니 기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요즘은 일이 이렇게 돌아간다.
설레는 마음으로 모니터를 설치했는데 말도 안되게 해상도가 낮은 화면이 나와서 좌절했다. 예전 모니터의 DVI 케이블을 그대로 썼는데 이게 원인이었나보다. 케이블을 바꾸니 곧 환한 신세계가 열렸다. 2002년에 산 그래픽카드는 아직도 그럭저럭 쓸만한 모양이다. 예전의 모니터는 처분해야 되는데 이게 겉으로는 너무 멀쩡해서 기분이 좀 이상하다. 생물은 세월의 흔적을 겉으로 내비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무생물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나 모니터처럼 그냥 책상위에 얌전히 모셔 놓고 쓰는 물건은 더더욱 그렇다. 나는 때로 물건에도 마음을 줄 때가 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멀리에서 왔다고 살짝 억지를 부려서 한 시간만에 바지 기장을 줄였다. 그동안 압구정동 일대를 돌아다녔는데 바람이 생각보다 거셌다. 시간 맞춰 돌아와서는 길이 맞춰 수선한 바지를 입고는 그대로 가겠다고 했다. 사실은 반바지를 입고 나갔었다. 적어도 이번 주까지는 입을 생각이었는데 염창역까지 갔을 때쯤 이제 그만 입을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름이 그렇게 갔다. 보내고 나니 그래도 올해는 딱 보통의 여름 정도였던 것 같다.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여름의 사랑 따위 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 by bluexmas | 2011/09/21 00:54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