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저녁
밖에 나갔다가 잠깐 상암동 홈플러스에 들렀다. 요즘 나는 상태가 살짝 좋지 않아 좀 바보짓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모 위스키의 말도 안 되는 가격이 사실 땡처리 때문이니 좀 사 두면 좋
(여기까지 쳤는데 모니터에 금색 등판의 똥파리가 앉아 주먹으로 쳐 죽였다. 일찍 일어나는 새는 벌레를 먹는데 일찍 일어나는 또는 잠 안 자는 벌레는 잠 못 자는 자영업자 주먹에 맞아 죽는다)
은데 그게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정말 온갖 색깔 딱지의 조니 워커와 발렌타인이 있는 가운데 말도 안 되는 가격표-물론 다른 곳에서도 같은 가격으로 팔고는 있지만-를 달고 있는 그걸 달라고 하자 점원은 오는 사람들은 모두 조니 워커와 발렌타인만 찾는데 신기하다며 혹시 외국에서 살다 왔냐고 물었다. 길게 대답하기 싫어 그렇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외국에서 살다 온 거랑은 전혀 상관이 없다. 정말 외국에 살 때는 보드카만 마셨으니까. 그럼 지금은 위스키가 좋아서 마시는 걸까? 그냥 술이 좋아서 마신다고 하자.
또한 조니 워커와 발렌타인도 훌륭한 술이다. 아, 맥켈란과 글렌피딕도 있었다. 모두 훌륭한 술이다. 부드럽고 달다. 세 병을 채우니 쓸데없이 마음이 뿌듯했다. 이런 거에 집착하고 있는 나의 상태는 확실히 좋지 않은 것이 맞다.
다래끼가 생겨 얼른 약을 먹었는데 조금 가라앉나 싶더니 다시 좀 도지는 경향을 보여 그 홈플러스의 약국에 갔더니 점원이 약을 한 사흘은 먹어야 한다면 두 종류를 각 두 상자씩 만원 어치나 팔았다. 돼지고기, 밀가루, 계란, 우유, 술, 야식을 먹지 말라면서. 그냥 굶으라고 하지 왜! 이 지극히 습관적인 상행위에 염증을 느꼈지만 피곤해서 대꾸하지 않고 그냥 집어왔다. 모든 약국에서 다 그런 식으로 약을 팔지는 않는다.
짐이 불어나 택시를 타고 강을 건넜다. 일년에 한 두세 번쯤 나를 닮은 저녁이랑 마주치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이 그랬다. 이마에 뾰루지도 돋아나고 입도 헐었지만 그건 그냥 두기로 했다. 그 세 가지가 한꺼번에 공격하는 경우는 참 흔하지 않다. 요즘이 그런 때다. 이 시간에 깨어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알 것 같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잘 모른다. 그러나 지적하지 않는다. 환상을 굳이 깰 필요는 없다. 각자의 세계는 각자의 인력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인력=환상’인 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아직까지는 원하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것까지만 손에 들어오고 있다. 시간이 없다. 부족한 채로 늙어간다.
# by bluexmas | 2011/09/08 02:57 | Life | 트랙백 | 덧글(12)
글렌피딕 글렌캐넌 한정판이 무지하게 땡기던데 가격때문에 좀 망설이게 되더군요.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