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Inertia

관성은 관성인데 관성이라고 쓰지 않고 굳이 ‘inertia’라고 쓰고 싶은 상황이 있다. 그냥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택시를 타고 수원역으로 가면서 3시 20분에 떠나는 새마을호의 표를 예매했다. 용산까지가 4,700원? 뭐 그래도 탄다. 그런데 역에 도착하니 12분 무궁화도 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만 용산에서 서지 않는다. 영등포와 서울역을 고민하다가 엉겁결에 서울역까지 표를 사 버린다. 말탄 김에 경마 잡히는 꼴은 아니지만 내친 김에 서울역에서 내려 걸었다. 해가 나자 걷고 싶어졌다.

오늘 하루는 여섯 시에 시작되었다. 오늘 해야 될 일 준비를 하고, 20분을 간신히 내서 달리기를 꾸역꾸역했다. 장마철에는 운동하기 힘들다. 바람이 많이 불어 두건이 날아갔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뛰어나가 강남으로 내려가 일을 두 시간동안 하고 바로 수원행 버스를 탔다. 스트레스 덕분인가, 아직도 지구에 공룡이 있던 시절 먹었던 보름달빵이 생각났다. 버스에서 내려 눈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없었다. 오레오 두 개들이 팩을 사서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쑤셔넣었다. 별 효과가 없었다. 90칼로리만 있었다.

서울역에서 롯데백화점까지 쭉 걸었다. 중간에 남대문 알파에서 아무 생각없이 펜들을 만지작대다가 지금까지의 방황을 끝내게 만들어 줄 것 같은 걸 찾았다. 쓰는 걸로 인정받게 되는 날이 온다면 손글씨로 필사본을 만들어서 내놓고 싶은 꿈이 있다. 어쨌든 그런데 쓸수 있을 것 같은 펜을 찾았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어딘가에 아직도 쳐박혀 있는 만년필 대신이다. 나는 아직도 그걸 쓸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주 안 될지도 모른다. 바쁜 일이 지나면 책상을 깨끗이 정리하고 다시 알파로 돌아가서 이 펜을 한 두 다스 정도 사서 가득 꽂아놓고 흡족함을 느끼겠노라고 마음먹었다.

롯데백화점에 이르자 커피를 마시고 들어가고 싶어서 그대로 이태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해서 커피를 쑤셔넣고 녹사평에서 6호선을 탔다. 요즘 계속 이런 패턴이다. 시간이 날 때는 쉬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야말로 나쁜 관성이 붙은 상태다. 몸이나 마음 둘 가운데 하나의 엔진이 잘 꺼지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다. 인간차원의 관심을 그 이상의 것으로 자의 및 확대해석하면 곤란하다. 내부에서는 대부분 설정되어 있다. 근거도 있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 합정역 다음이 당산이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고민하다가 내렸던 지하철에 다시 올라탔는데 강이 안 나오고 망원역이 나왔다. 쯧쯧. 플랫폼을 건너 다시 합정역에 돌아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노닥거리다가 잠깐 잠에 빠졌는데, 일어나보니 불이 안 들어왔다. 태풍때문에 정전이 된 줄 알았더니, 집에만 뭔가 좀 이상이 있었다. 경비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하러 내려간 김에 진짜로 보름달을 샀다. 세 개 들이로 손이 뻗쳤으나 꾹 참고 낱개를 집어 들었다. 입에 쑤셔넣으니 곧 시큼한 맛이 가득차고 곧 뱃속에 그대로 보름달이 떴다. 이렇게 오락가락한 날에도 어딘가에는 보름달이 뜬다. ‘It’s five o’clock somewhere’ 뭐 이런 건가.

관계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상대방을 위하려고 하는 순간 망가지기 시작한다. 요즘 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가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해독해야만 하는 메시지를 너무 오랫동안 흡수하고 살았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뭘 원하는지 비교적 분명하게 안다. 이 나이 되도록 모른다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하긴 모르려면 끝까지 모르고 살아야 한다.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라야만 한다. 스스로를 속여야만 한다. 그것도 어쩌면 삶의 짭짤한 재미일지도 모른다. 남들을 속이는데 능수능란하다면 자기를 대상으로도 도전해보아야 하지 않겠나. 이 모든 삶의 자잘한 비극들에서, 최종보스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알면서 모른척 좀 하지 마라. 킹기도라 껍데기 같은 거 뒤집어 써도 자기 자신이니까 다 알아보잖아. 눈빛만 봐도. 한때는 사랑도 해 봤으니까.

 by bluexmas | 2011/06/27 00:36 | Lif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by 강우 at 2011/06/27 01:50 

보름달 빵이 혹시나 했는데 그 보름달 빵이었군요.

복고열풍 불면서 슈퍼에 다시 보일때 은근히 반갑더라구요.

마지막 문단이 심하게 와닿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6/28 01:13

네 그것이죠.

킹기도라는 고지라에 밀려 언제나 2인자… 메카고지라와의 대결이 그립네요.

 Commented by sasac at 2011/06/27 09:25 

자신이 원하는 걸 안다는 것이 가끔은 슬프지요., 산다는 것이 그건 것 같아요.

말씀대로 모르고 사는 것이 차라리 더 편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버리고 나면 자신을 속이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하더라구요. 괴로울 때는 그저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 최선인 듯.(모든 사람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저는 눈을 감아야 하는 상황이라서요..;;;)

보름달 빵이 반가워서 글 남기고 갑니다.

저는 아마도 반년 전부터 매주 달이 뜹니다. 뱃속에..^^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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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구독하고 있는 중~^^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6/28 01:13

그래도 알고 사는 게 모르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네이버 아이디로 덧글이 올라온 게 신기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