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森
“그래서 저는 침엽수가 진짜 나무라고 생각해요.” 처음, 그것도 일 때문에 만나는 남자 앞에서 꺼내는 이야기치고는 스스로도 꽤나 쌩뚱맞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쌩뚱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딸 눈치도 보면서 살아야 되냐. 어쩌다 집에 찾아가도 ‘응’과 ‘아니’로만 대답하는 그녀에게 엄마는 늘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더듬어보면 활엽수나 여름 숲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어요. 온통 겨울과 눈과 얼음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침엽수림 뿐이죠. 두께도 굵기도 없는 잎새 사이로 삐져나오는 햇살 같은 것들 있잖아요. 다발로 모여있어야 겨우 잎사귀처럼 인식될까 말까 한 것들. 그 사이로 삐져 나오는 햇살. 그에 비하면 활엽수들은 정말 이기적이에요. 사이로 흘려보낼 햇살이 어디 있어요. 다 빨아먹고 말지.특히 열대지방에 있는 것들 봐요. 야자나무 잎사귀 같은 것들, 꼴도 보기 싫다구요. 그토록 탐욕스럽게 햇살을 빨아먹고도 축축 처진 꼬라지하고는.”
그렇게 단숨에 말을 뱉어내고 앞에 놓여 있던 물을 가쁘게 들이키는데, 그제서야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게면쩍은 웃음과 함께. 그녀는 숨을 돌리고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이름은 진삼이었다. 이진삼(李眞森). 고개를 들어 다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게면쩍은 웃음은 아직도 그의 얼굴 전체에 걸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침엽수라서 웃는 것일까 아니면 활엽수라서? 갑자기 그동안 만만하고 간단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버겁고 복잡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것들의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고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4월이 정말 내일 모레고, 그 전에 생일이 닷새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내리는 눈을 보는 심정은 참으로 착잡했다. 그래, 돌아보면 착잡한 겨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그렇게.
6,7개월만에 친구를 만난다고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수원 어딘가쯤에서 눈이 살짝 쌓인 쪽들판을 스쳐지나갔다. 어딘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겨울의 땅을 스쳐지나가며 보았던 들판이며 나무가 생각났다. 때마침 위키피디아를 어찌어찌 흘러가다가 Doris Stokes라는 영매에 대해 읽고 있었는데 적어도 십 년은 듣지 않았던 Spiritualized가 생각났다. 모든 것이 나는 납득할 수 있지만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방향으로 얽혀서 흘러갔다. 바로 아이튠스로 노래를 샀다. 들으면서 스쳐보낸 쪽들판과 비슷한 것들을 몇 개 더 스쳐보냈다. 그러면서 그동안 들렀던 겨울 도시들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침 오후에 우연히 만난 어떤 분과 일에 얽힌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점점이 이어져온 내 겨울 도시 여정의 종착역이 화제로 떠올랐다. 형편이 조금만 나아진다면 올 겨울에는 나도 꼭 가고 싶은데, 글쎄 그렇게 될까.
사실은 겨울이 지나가지 않기를 바랬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년 겨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동안 잊어버릴게 뻔하니까. 유난히 숙제처럼 버거운 겨울이었지만 결국 그 숙제를 끝낼 수 없었기 때문에 보내고 싶지 않은데 아랑곳하지 않고 계절은 그렇게 흘러간다.
적당한 사진을 한 장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보다. 없다.
# by bluexmas | 2011/03/26 09:16 | —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