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상수동]델 마(Del Mar) 캘리포니아 퀴진의 허와 실
음식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힘을 다 빼버릴 것 같아(지난 번의 글처럼) 간단히만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캘리포니아 퀴진(California Cuisine)의 핵심어(keyword)는 ‘융합(fusion)’과 ‘신선한 재료(fresh ingredients)’이다. 주로 지리나 기후 덕분이다. 캘리포니아 주는 다른 주보다 보다 더 개방적인 분위기로 다른 나라의 식문화를 받아들인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나 하와이를 통해 전달된 일본, 지중해나 우리나라까지 다양한 식문화가 기죽지 않고 존재하는 곳이 캘리포니아다.
이러한 캘리포니아 퀴진을 우리나라에서 시도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첫 번째 의문은 과연 ‘캘리포니아 퀴진’이라는 용어 자체를 그대로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음식 자체에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기는 하지만, 그 특징 자체에 어느 만큼의 독창성을 부여해야 할지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또한 재료에 관한 접근은 비단 캘리포니아만의 방법론이 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미국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전국이 1일 택배권인데다가 기후적인 조건 때문에 미국 또는 캘리포니아만큼 재료의 다양성을 지니기 어려운 우리나라에서 제철에 맞는 재료는 선택이 아니라 제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으로 홍대 놀이터 골목에 있는 ‘델 마(Del Mar, 그 이름 또한 남부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의 동네이다. 물론 of/by the sea의 스페인어)’를 찾았다. 찾아가기 전 레스토랑의 블로그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수율이 낮은 게를 사다가 쪄서 하나하나 살을 바르는 셰프의 모습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살만 발라 파는 게를 사기가 쉽지도 않으니 원한다면 직접 손질을 해야 하겠고 또한 그게 음식 만드는 사람의 일이기는 하지만, 수율이 낮은 게를 손질하는 건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 최소한 의미만큼은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제철 재료를 적극 사용해서 만들었다는 음식에 우려를 느낄만한 부분도 있었다. 그 이야기는 뒤에 가서 마저 하겠다.
연말이었는데, 4인용 자리가 넷 밖에 없고(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마저도 세 개만 예약을 받는다는) 셰프 혼자서 조리를 하는 레스토랑이어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기다려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다섯 시 사십오 분까지 간다고 했으나 다른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 도착한 시간은 다섯 시 반. 곧 음식이 나올 것이라고 했지만 기억하기로 처음 음식이 나온 시간은 여섯 시였다. 30분 동안 멀거니 앉아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해야 테이스팅 코스를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뭘 먹을 수 있느냐고 했더니 기본적으로 짜인 메뉴가 있지만 셰프가 장을 보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대답을 들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가장 다양하게 음식을 먹을 있는(즉 비싼-_-) 코스가 6만원이라고 해서, 예약시 그것으로 주문을 했다. 사실 “셰프가 장을 보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라는 말을 나는, 그날그날 재료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어쩌면 그게 이러한 레스토랑의 진짜 매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뉴를 받아들자 나는 그 말이 “늘 하는 음식의 재료가 없을 경우 바꾼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다. 블로그에서 보았던 메뉴와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나오는 전채는 해물을 주재료로 만든 세 가지였다. 맨 왼쪽부터 광어(메뉴에는 넙치라고 나와 있지만 영어로는 ‘fluke’라고 되어 있었다. 좀 헛갈린다) 카르파치오, 굴에 살사 프레스카와 토마토 그라니타 그리고 오이 카펠리니(결국 얇게 채친 오이), 아귀간으로 만든 토숑(torchon, 푸아그라를 수건/행주 torchon 즉 towel에 싸서 삶는poach 조리방식)이었다. 카르파치오를 먹으니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일단 간이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소극적-캘리포니아 퀴진이라서? 올리브 기름도 그런가?-이라는 것이었고, 귤을 넣은 목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맛이 너무 없어서 산을 더하는 목적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과일은 대부분 너무 달아서 음식에 더할 때 균형을 깰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는 조금 더 뒤에…
좋은 굴은 아무 것도 더하지 않고 그냥 먹어도 괜찮은데, 여기에 오이, 살사, 그리고 토마토 그라니타까지 더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굴 자체가 괜찮았으니 굴을 감추려는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의 기온이 영하 13도, 겨울 들어 처음으로 굉장히 추운 날이었는데 굴이야 그렇다 쳐도 위에 잔뜩 얹힌 차가운 것들은 재료의 신선함이나 만든 이의 솜씨에 상관없이 잘 다가오지 않았다. 거기에 타바스코의 그것으로 짐작되는 매운 맛이 쭉 뚫고 올라왔다.
아귀간에 폰즈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그 매개체가 타피오카 버블인 건 어떤 의미일까? 쫀득한 타피오카 버블을 폰즈에 재워두면 정말 간이 배는 것일까? 만약 타피오카 전분의 투과성이 그렇게 좋다면 버블티에 넣었을 때 풀어져버리지 않을까? 거기에다가 삼투압까지 생각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쫀득한 식감은 흔히 사람들이 ‘녹진하다’라고 말하는 간의 식감을 만끽하는데 방해가 된다. 아귀간은 씹으면서 즐기는 음식이 아니다. 푸와그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 부드럽고 진함이 매력이라는 걸 알면서도 타피오카 버블을 곁들이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의도는 알긴산 나트륨 등을 이용한 폰즈 캐비아를 곁들이는 것인데 그게 어떠한 이유에서 불가능해서 이런 식으로 대체를 한 건 아닐까 생각도 들기는 했다(요즘 추세에 그 정도 테크닉을 “분자요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생각을 좀…). 만약 그런, 진짜 ‘가짜’ 캐비아였다면 입에 넣는 순간 톡톡 터지면서 아귀간과 아주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래도 모과 마멀레이드-이 정도의 식감이라면 아귀간을 방해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의 향이나 단맛이 폰즈나 아귀간과 아주 좋은 대조를 이뤄, 이날 먹었던 요리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맛이기는 했다.
다음은 게살과 사과 샐러드. 우리나라의 사과는 너무 달다. 그래서 이러한 음식은 물론, 사과파이와 같은 디저트에도 그렇게 좋은 재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게살은 예민하다. 여기까지 계속해서 차가운 음식만 나왔다. 전채는 늘 차가와야만 하는 걸까?
넙치(turbot, 위의 fluke와 다른 생선을 쓴 것인가?)구이와 생토마토 소스, 섬초와 링귀니처럼 얇게 썬 오징어 볶음. 드디어 따뜻한 음식이 나왔다. 넙치와 오징어만 기억에 남아 있는데,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구운 생선이야 그렇다고 쳐도, 재료를 너무 오래 볶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나온, 모든 불을 댄 음식들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삼겹살 콩피, 김치 카포나타와 마늘을 더한 으깬 감자. 메뉴의 약속과는 달리, 삼겹살의 속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이러한 코스에서 고기의 무게 및 크기는 조리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서양식으로 굽는 고기는 결국 겉의 바삭함과 속의 부드러움이 대조를 이루는 것이 핵심인데 코스에 맞춰 작고 무게가 덜 나가는 고기를 조리하면 그렇게 조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이 다음에 올라올 스테이크에 관한 글에서 다시 언급할 예정이다). 최근 미국에서도 인기를 얻다 보니 삼겹살을 조리하는 레스토랑이 늘어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늘 구워 먹는 고기의 개념으로 접근을 해서 그런 것인지, 만족스럽게 조리하는 집은 찾기가 어렵다. 늘 말하지만, 삼겹살은 지방이 많다고 무한정 조리할 수 있는 고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맨 윗겹의 고기가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삼겹살을 메뉴로 내놓으려는 셰프들은 차라리 잘 한다는 중국집에 가서 동파육을 먹어보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띵하우>와 같은 집에서도 만원 대에 동파육을 먹을 수 있는데, 조미료를 넣어 들척지근한 소스는 그냥 그렇지만 하루 전에 직접 조리한다는 삼겹살은 이런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조리되어 있다.
어쨌거나 이 삼겹살은 딱딱했고, 설상가상으로 오돌뼈(연골)가 붙어 있었다. 정확한 의도는 내가 헤아리기 어렵지만, 서양 음식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뼈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생선이나 고기 모두, 가시나 뼈가 없도록 손질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손을 쓰지 않고 도구를 써서 나름 우아하게 먹는다는 그네들의 파인 다이닝 개념에서 식사 도중 도구를 내려놓고 손으로 입을 가져가 뼈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예절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치는… 이런 시도 자체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김치가 가지고 있는 매운맛이 전체 코스에서 대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려를 좀 해 줬으면 좋겠다. 게다가 요즘은 사람들이 비이성적으로 매운맛을 좋아해서 폭력적으로 매운 맛이 지나친 고춧가루 일색이다. 예전에 정식당에서 무슨 리조또라는 이름으로 김치찌개에 비빈 밥을 먹었을 때와 같은 생각이다.
뼈도 나왔고, 삼겹살이 딱딱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접시를 치우러 온 서버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게 저온 조리로 다르게 조리해서…” ‘아 네 그러셨는지요’ 한마디를 붙인 것도 아니고 바로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자세가 나에게는 방어적으로 다가왔다. 딱딱했다고 말 한마디 못하나? 단면의 폭이 2cm가 될까 말까 한 삼겹살이 정말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울 수 있을까?
굴과 어린 새송이 버섯의 생면 파스타. 이보다 나은 굴과 면의 조합은 다른 곳에서도 먹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생면을 쓰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계속해서 불을 많이 댄 느낌이었다.
마지막의 스테이크. 늘 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코스에서 나오는 스테이크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잘 조리하기도 어렵고, 고기가 좋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구색 맞추기를 위한 스테이크라면 먹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나온 스테이크는… 정말 그랬다. 고기가 부드러워서 맛있고 질겨서 맛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부위는 운동을 많이 해서 질기지만 맛있고, 또 다른 부위는 운동을 안 해서 부드럽지만 맛은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스테이크는 질기-다기 보다 딱딱하-고 아무런 맛도 없었다. 이리저리 잘라 먹어 보았으나 가운데 부분이라고 딱히 다른 건 아니었다. 같이 나온 배추와 버섯볶음 또한 윤기가 죽은 것이 불에 너무 오래 볶은 느낌이었고, 페스토의 존재 또한 딱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뭐 그래봐야 두 쪽일 뿐이지만, 먹지 않은 채로 돌려보냈다. 접시를 치우는 서버는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大亡)의 디저트. 솔직히 이야기하자만, 메뉴를 보았을 때 이미 디저트 부분에 있어서는 실망을 하고 있었다.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싼 코스라면 디저트에 대해서도 고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달랑 리코타 치즈와 오디 그라니타? 캘리포니아 퀴진에 디저트가 없는 건 아닐텐데… 추운 날씨에 딱히 따뜻하게 난방을 한 것도 아닌 레스토랑에서 손님은 거의 나 혼자였다. 차가운 공기를 뚫고 끼익끼익, 포크로 얼음을 긁어 그라니타를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말로 등골이 오싹했다. 온도도 문제였지만, 나온 디저트에는 정말 아무런 맛도 없었다. 설탕이 많이 들어간 디저트를 만들고 싶지 않다면 신맛이 두드러진 디저트도 가능하고, 어쨌든 이게 아닌 그 무엇도 가능한 것 같은데 이 추운 날 꼭 저것이어야 하는 이유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먹고 일어서는데, 셰프가 맛있게 먹었냐고 물어보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그냥 스테이크가 질겼다는 이야기만 했다. “아 이 고기는 등심이 아니라서요…” 나는 그걸 몰라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그냥 나왔다.
내가 <델 마>의 음식을 먹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캘리포니아 퀴진이라는 것의 지나친 자의적인 해석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식사에 빵이 나오지 않아서 물어보니 밀가루를 먹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에 주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럼 캘리포니아 퀴진에서는 빵을 아예 먹지 않나? 물론 그러한 식으로 저탄수화물 또는 무(無) 글루텐 식단을 꾸려 나가는 사람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종류 불문하고 나는 건강식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에 가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집에서 얼마든지 해 먹을 수 있다. 만약 <델 마>가 캘리포니아 퀴진이라는 기치 아래 그런 음식을 표방한다면 블로그를 통해 그런 점을 분명하게 밝혀서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어느 캘리포니아 동네를 표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샌프란시스코의 특산물은 자연 발효종으로 만드는 사워도우(sourdough)다. 정말 캘리포니아에서는 빵도 안 먹나? 차라리 셰프 혼자 꾸려 나가는데 마음에 드는 빵을 만들거나 납품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해를 할 것이다. 통상적인 빵이 철학에 안 맞아서 내놓고 싶지 않다면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을까?
디저트도 마찬가지다. 저런 디저트는 솔직히 발상이나 맛 모두에서 아마추어적이라고 생각한다. 코스라는 건 전채나 주요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디저트도 중요한 코스의 일부분이고, 그것으로 코스가 완성되며 셰프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디저트가 없으면 코스가 닫힌 느낌이 들지 않는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왜 차 한 잔도 내놓을 수 없는지, 그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만약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커피 내놓는 걸 싫어한다고 치자. 거기에는 대안이 없을까? 차도 가능하다. 차에도 만약 카페인이 들어 있어 내놓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김치는 썼는데 대추차, 생각차, 그리고 마멀레이드에도 재료로 썼던 모과차는 불가능한가? 영하 13도의 날씨에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6만원에 뜨끈한 방바닥에서 숯불에 한우를 구워 먹고 된장찌개에 쌀밥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아 잘 먹었다’라며 자신의 선택에 뿌듯해 할 것이다. 물론 한식과 경쟁을 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전반적으로 센스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러한 센스 없음은 코스 전반에서 두드러진다. 작은 레스토랑의 장점이 무엇일까? 나는 잠재적인 융통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종류를 막론하고 레스토랑이라면 미리 메뉴를 짜서 재료를 준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탁자 네 개에 그것도 세 개만 손님을 받는다는 규모의 레스토랑이라면 저녁 내내 손님을 많이 받아야 20명 안팎일 것이다. 그것도 <비엥 에테르>처럼 완성도에 상관없이 미친 밑준비를 요구하는 음식도 아니다. 그런 정도의 규모라면 날씨에 맞춰 작은 융통성을 발휘할 센스쯤 기대할 수 없을까? 굴 전채를 예로 들어보자. 그 정도로 추운 날씨라면 ‘아 전채들이 전부 너무 차가운 것 같은데 굴을 살짝 튀겨 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아 우리는 튀김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안…’이라고 반론할 수는 있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의미는 튀김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식당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셰프를 찾아온 손님에게 그러한 배려도 할 수 없다면, 정확하게 손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그걸 묻고 싶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에는 이렇게 추운 겨울이 없으니 이런 짜임의 코스를 쭉 먹어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핵심은 지킬 수 있겠지만, 그 정도의 고려는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일부러 전화 걸어 예약까지 해서 미리 코스를 먹겠다고 말하고 돈을 쓰는 사람이 삼겹살이 딱딱하다거나, 스테이크가 맛이 없다는 이야기도 못한다면 그런 음식점에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 손님으로 가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30분이나 기다리는 동안 물 한 잔 딱 가져다 놓고 멀거니 있는 레스토랑의 센스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6만원이고 60만원이고를 떠나, 적어도 그날 저녁에는 내가 가장 비싼 음식을 주문한 손님 아닌가? 나는 왕 대접을 받자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접은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중에 들어온 손님은 아는 사람이었는지, 서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히게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의 느낌이 들었다. 혼자 밥을 먹으러 갔으니 서버가 앞에 앉아서 말동무를 해줬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기계적인 대응에 센스 없음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레스토랑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경력이 짧은 이삼십대 “셰프”들의 경험부족을 지적하고 싶다. ‘craft’가 요구되는 직종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연습하지 않고서야 스물 후반 서른 초중반에 자신의 세계가 확립되리라고 바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학교를 다녀왔네 하면서 어느 한 구석도 완성되지 않은 “셰프”들이 음식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음식에서 우러나는 경험 부족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남의 돈을 먹고 싶으면 음식을 좀 제대로 만들자. 헤어드레서들도 경험 쌓으려고 봉사 나가서 머리 공짜로 잘라준다고 들었다. 왜 내가 완성되지도 않은 “셰프”들의 시식단을, 그것도 내 돈을 내면서 해 줘야 되나?
# by bluexmas | 2011/01/17 10:10 | Taste | 트랙백 | 핑백(1) | 덧글(13)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2/11/22 10:30
… nbsp;김미영 셰프의 새 이태원 레스토랑 <고사소요>에 대한 운을 떼려니 사설이 길었다. 굳이 인신공격 이야기를 한 이유는, 예전 레스토랑 <델 마>에 대한 나의 글이 혹시 그렇게 읽히지는 않을지 오늘날까지도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늘 해왔기에 기고했던 지난 달 <얼루어>에서 제철 해산물 … more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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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질긴게 당연하다는게 제돈도 아닌데 6만원이 막 아까워지네요;;;
그런데 혹시 등심은 안심이 아니라서요.. 그런 식으로 말했다고 하신 데가 여기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