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밥을 안쳤다

1,400번째.

…그 순간은 영화 같은 데에서 많이 본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에, 의외로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진실의 옷을 입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접하다 보니 정작 진실을 접해도 거짓말처럼 느껴져서 동요가 없다고나 할까. 늑대가 나타났어요. 정말, 어디? 늑대가 나타났어요. 어디? 늑대가 나타났어요.

…응, 그래.

꼭 그런 느낌이었다. 국민 여러분, 끝이 다가왔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정장차림의 남자가 정규방송의 흐름을 끊고 모습을 드러냈다. 워낙 그는 거짓말이나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잘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실 믿기가 어렵기는 했다, 마지막을 입에 올리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정말 오늘따라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냥 믿기로 했다. 이건 천재지변이기 때문에 저희 정부는 물론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도 더 이상 대책을 강구할 수 없음을 유감…

이제는 더 들으나 마나한 소리를 할거라는 생각에 일단 텔레비젼을 껐다. 그래도 같은 소리는 윗집에서, 옆집에서, 아랫집에서, 온 단지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마루에 있는 오디오에 아이팟을 연결하고는 셔플로 돌렸다.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온다면 어떤 노래를 들으며 마지막을 맞이해야 할까 라는, 그때로써는 실없는 생각을 종종했지만 막상 그 상황이 진짜로 닥치자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걸 고민할 시간에 다른 걸 하고 싶었다. 소리를 키워 다른 집에서 새어 나오는 들으나마나한 소리를 차단했다.

냉장실 문을 열어 현미찹쌀과 보통 현미, 그리고 흰쌀을 꺼내고 냉동실에서 얼마 전에 삶아서 넣어두었던 팥을 꺼냈다. 사실은 어제 지어서 두 끼를 먹고 남은 밥이 한 공기씩 나뉘어 냉장실에 들어있기는 했다. 그러나 알게 뭐람, 어차피 가는 마당인데. 새 밥을 먹고 싶었다. 현미찹쌀 1에 보통 현미와 흰쌀을 1/2씩 섞어 세 공기 분량의 쌀을 씻고, 팥을 넣어서 밥을 안쳤다. 그리고는 일단 목욕탕으로 가 평소보다 조금 긴 샤워를 하고, 면도도 했다. 어딘가에 나오는 것처럼 가장 아끼는 옷 따위를 입을까 하다가, 그것도 밥을 먹는데에는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서 속옷만 가장 아끼는 것으로 갈아입고는 그냥 집에서 입는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을 고수했다.

아직 젊은, 즉 기능을 하는 나이었으니 사실 밥을 먹기 보다는 침대 위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이 보다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곁에는 그래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재수없도록 까다로운 성격 탓에 누군가를 옆에 들이지 못한 것이 꽤 여러해째였다. 밥도 계속해서 안 먹으면 그 관성으로 먹고 싶지 않아지는 것처럼, 그에게는 한참 동안이나 별 욕구가 없었다. 한 번 더 한다고 그동안 얼룩졌던 삶이 막판에 더 아름답게 느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누군가 왜 그렇게 사냐고 물어보면 깨끗한 속옷을 사기 귀찮아서, 라고 대강 둘러대곤 했다. 고등학교 때였나, 제목만 ‘마루타’였고 실제로는 도색소설이었던 무엇인가가 교실에 돌았던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주인공이 가스실에 집어넣은 생판 모르는 남녀가 죽는 순간에 서로에게 엉겨 붙는 상황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지는 장면이 나왔었다. 식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우루루 아파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다들 어딘가 갈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압력밥솥이 조금씩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고, 구수한 밥냄새가 집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직 마지막의 조짐은 느낄 수 없었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새로 지은 밥을 먹을 시간은 있었으면 좋을테니까. 그는 어차피 갈 데가 없었다. 부모님은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형제들과는 별 왕래를 하지 않았다. 혹시,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들어보았으나 신호가 갈리 없었다. 그냥 식탁에 앉은 채로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하루 종일 쓰던 걸 마저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모두에게 마지막이니 딱히 더 아쉬울 것도 없기는 했지만, 삶은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유학을 갈 때만 해도 뭐 좀 잘 될 것 같나 싶었더니, 경제가 나빠지자 다니던 회사에서는 정리해고 1순위에 올라 바로 퇴출되었고 타의로 돌아와서는 더 이상 회사에는 다니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번역도 하고 이런저런 잡문도 썼지만 때때로 부모님에게 고개를 돌린채로 손을 벌리지 않고서는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알려지기도 꼭 그만큼만 알려졌다. 그가 쓰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지만 그건 다른 먹고 살기 위한 것들을 쓰느라 생각만큼 열심히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그런 것들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주중에는 먹고 살기 위한 것들을 쓰더라도 주말에는 진짜 쓰고 싶은 것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행동에 옮긴지도 몇 년 되었지만 의욕만큼 진전은 없었다. 이번에는 근 두 달쯤 마무리를 한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 남녀가 마지막으로 만나 갈등을 해소하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는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갈등을 해소한다면 “그러고 보니 젖빛 유리창에 새겨진 무늬가 눈송이 모양이라는 것이, 조금씩 흐려지는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라는 문장으로, 그렇지 못한다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도 정말 애를 써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다른 때 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야만 했다.” 라고 끝낸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상황을 짜맞추고 있었다. 손을 키보드에 얹은 채로, 그냥 화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밥솥이 밥짓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삑, 소리를 남겼다.

비록 밥이 다 되기는 했지만, 압력밥솥이라도 뜸을 잠시 들이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만들어놓았던 세계에 마무리를 지어주기로 했다. 사실 애초에 품었던 계획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이었지만, 현실의 세계가 마지막 순간에 놓여 있는 마당에 비관적으로 짜게 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상황에 맞춰 놓은 결말을 싹 지우고, 조금씩 흐려지는 시야에 들어오는 젖빛 유리창에 눈송이 무늬를 넣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연애담이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져 눈송이 무늬를 넣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읽지 않게 될 것이었다. 자의도 아니고 타의로, 그리고 차라리 타의가 더 속편했다. 내놓을 수 없어서 아무도 읽을 수 없다면 차라리 낫다. 내놓아도 아무도 읽지 않는 상황이 그에게는 늘 힘든 것이었다. 언제나 마지막 남은 희망을 가닥을 붙잡고 다음 번, 을 기약해왔지만 그러는 사이에 이렇게 끝이 찾아왔다. 남자와 여자는 1년 열 두 달 동안 서로가 간직하고 있던 겨울의 추억을 나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랴, 이제 와서. 만나든 만나지 않든, 사실은 별 상관도 없으나 그저 최소한의 배려를 할 뿐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않는 세계라 할지라도. 언제나 그 세계는 바라지만 이룰 수 없는 환상을 형상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아질 수록, 형상화에 쏟는 시간은 길어지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젖빛 유리창에 새겨진 무늬가 눈송이 모양이라는 것이, 조금씩 흐려지는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라고 마무리를 짓고는, 밥통을 열었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김이 확 피어 올랐고, 눈앞이 흐려져서 안경을 벗어야만 했다. 안쪽의 밥통을 꺼내 귀처럼 나온 손잡이를 들고 조심스레 식탁으로 옮기고는 김과 김치를 꺼냈다. 이제는 더 이상 저탄수화물 다이어트 따위에 목매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내심 흐뭇했다. 평생을 따라온 비만의 굴레라도  이렇게 그 평생이 끝나니 내려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밥통에서 그냥 밥을 꺼내 먹을까 하다가. 너무 뜨거우면 김이 바로 눅눅해질 것 같아서 일단 반 정도를 대접도 아니고 접시도 아닌, 적당히 넓으면서도 우묵한 그릇에 퍼 담았다. 왼손으로 김을 집고 오른손에 쥔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는, 가슴팍의 한가운데에서 두 손을 모아 밥을 김에 싸서는, 입에 넣었다. 그냥 이 정도면 충분했다. 여자는 스물 여섯이었지만 마흔 다섯의 남자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왔었는데 그 남자는 어느 날 연락도 하지 않은채 사라졌다. 그리고 만나게 된 다른 남자는 그때 서른 둘이었다.

 by bluexmas | 2010/01/27 01:34 |  | 트랙백 | 핑백(1) | 덧글(12)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1/05/02 03:56

… ; 7. 황사가 심하긴 심하더라. 달리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밖에 나가 있었는데, 눈이 따가웠다(착각이었을까?). 종말의 분위기를 느꼈다. 뭐 진짜로 그렇다면, 그냥 이나 해 먹고. 8. 근데 반찬은. 9. NFL 선수지명이 끝났다. 올 시즌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10. 오븐을 시험해봤다.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 more

 Commented at 2010/01/27 09:2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1/30 00:09

사실은 담담한 게 아니라 좌절을 너무 많이 해서 저것 밖에 못하는 무력감이랑 체념을 생각했던 것이기는 해요…

 Commented by 잠자는코알라 at 2010/01/27 10:32 

재미있어요 ^^; 처음부분 읽는데 갑자기 네이트온 알림으로 북한이 포 발사했다고 해서.. 어어?! 했네요 ㅋㅋ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1/30 00:09

흐흐 그렇다데요. 죽을때는 다 같이 죽어야 되는걸까요…

 Commented by Avila at 2010/01/27 12:00 

마흔 다섯의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요, 쓸쓸했겠죠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1/30 00:10

마흔 다섯의 남자는 이혼남인데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연락을 끊고 이사가버렸다고 하더라구요…

 Commented by 홈요리튜나 at 2010/01/27 16:21 

우회하지 않고 직선인 블루마스님의 글이 참 좋아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1/30 00:11

직선적인가요? 사실은 우회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좋아하셨다니 기분이 좋아요 🙂

 Commented at 2010/01/27 16: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1/30 00:11

짝 있는 사람은 짝과 시간을 보내셔야지요^^ 커피 한 잔 내려서 마셔야지요. 느긋하게…

 Commented at 2010/01/27 20:2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1/30 00:12

저도 마찬가지에요. 거기에다가 두려워서 못 쓰는 것도 있답니다. 머릿속에서 계속 짜맞추고만 있는 게 몇 가지 있는데 처음이랑 끝은 있고 다 결말은 없어요.

비공개님도 같이 화이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