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글 하나
어제 어쩌다가 아주 오랜만에 싸이의 홈피를 뒤져보았다. 쌓이고 쌓여 이제는 30만-물론 다들 와주셔서 고맙지요^^;;;, 숫자 공개 이런 건 낯간지럽고 체질도 아니라서 안 하지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 블로그와 달리 나의 싸이는 초라한 무인도와 같았다. 지금 다시 확인해보니 무려 5785명, 참 많이도 왔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그렇다.
내가 싸이에 쏟은 시간과 온 사람들의 수에는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거기에도 참 열심히…까지는 아니어도 꾸준히 무엇인가를 썼다. 아주아주 가끔 그걸 다시 들여다 볼 때가 있는데, 어제도 잠깐 넋을 놓고 그런 시간을 가졌다. 사실 이 블로그의 카테고리는 기본적으로 싸이 홈피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life’나 ‘-‘와 같은 카테고리가 그대로 있어서 같은 분위기의 글들을 썼기 때문에 그 글들을 죽 읽어보았다. 그리고 일기장의 것들도(싸이를 전체적으로 싫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기장은 참 좋아했다. 그냥 날짜 누르고 바로 한 줄씩 쓰는 뭐 그런 방식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글들에 깔려 있는 배경사건들을 기억하는데, 한 두 줄짜리고 쓴, 그리고 영어로 쓴 것들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다 기억하고 살면 버거우니까. 시간이 좀 지나고 그걸 들여다보면서 어떨 때에는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했는데, 어제는 그런 기분은 거의 들지 않았다. 그냥, 아 내가 그렇게 살았던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때로는 조금 더 자신을 제삼자처럼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로도, 아래로도 감정이 너무 많이 치솟거나 떨어지는 일 없이, 그냥 좀 담담하게.
어떻게든 백업을 할 수가 있다면 한꺼번에 해서 여기에다가 옮겨 놓던지, 그게 아니라도 어디엔가 좀 보관을 해 놓았으면 좋겠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기를 헤쳐갈 때의 기록이기는 해도 아예 그런 일들이 없었다는 것처럼 부정하면서 버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을 여기에 가져와볼까 고르다가, 이걸 가져와봤다. 나는 항상 그때와 지금의 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다. 나는 가면 갈수록 꼬인 인간이 되어간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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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일(작성일) : 2005.11.23 수(2005.11.24 14:09)
오늘 같은 날, 나는 자고 일어나면 내일 아침에는 세상이 달라져 있을거라는 쓸데없는 공상을 하다가 잠이 들곤 한다. 어떻게 달라지는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열 한시로 접어들자 심심함을 잠시 주체 못해 집 안에서 방황했지만 곧 바닥에 굴러다니던 ‘눈의 여행자’를 집어 들고 다시 안정을 찾았다. 그리하여 잠에 못 견딜때까지 책을 읽었다.
눈이 많이 오는 일본의 북쪽 어딘가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바램을 품어온 것은 아마 올 해로 삼 년째일 것이다. 이곳의 겨울이 춥지도 않고 눈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 부터. 눈이 많이 오기는 하지만 깨끗하게 내려 그다지 질척거리지 않는, 그렇게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는 동네의 작은 초밥집에서 그렇게 배부르지 않게 초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정종은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니까 삿뽀로나 기린 맥주 정도면 될 것 같다. 이상하게 아사히는 그렇게 마시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는 바람에 날리는 눈을 맞으며 사람이 별로 없는 거리를 걸었으면 좋겠다. 씨디플레이어든 MP3플레이어든 음악은 듣겠지만 볼륨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바람 소리를 듣고 싶을테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작은, 그러니까 10인치 정도 크기의 노트북을 그때까지 하나 더 가질 수 있다면, 아마 그걸 가지고 다니면서 글을 쓰고 싶어질 것 같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초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그리고 거리를 걷다가 다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어디든지 머물고 있는 호텔방으로 돌아와 커텐을 반쯤 열어 바깥풍경이 보이도록 놔둔채 글을 쓰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사진도 찍고 싶어질 것이다. 입고 다니는 더플코트 한 벌과 스웨터 두 벌, 바지 두 벌과 양말 몇 켤레, 그리고 목도리 정도면 될테니 짐은 그렇게 거추장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열흘쯤을 추운 곳에서 머물다보면 늘 벌겋게 타오르기만 했던 나의 머리도 조금은 식을테고, 비었던 가슴은 찬 기운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그리고는 다시 겨울에도 비교적 따뜻한 이 곳으로 돌아온 뒤, 한 삼 사년 간은 추운 곳 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에 채워두었던 냉기를 조금씩 꺼내서 타고 있는 곳을 조금씩 식히면 되겠지.
분위기가 맞는 사진이 있나 찾아봤더니 눈을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시카고에서도 눈이 내리지 않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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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지금 보면 약간 철 모르는 유학생의 가벼운 된장질 같은 느낌이 나서 얼굴이 살짝 벌개지려고 한다.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저렇게 써 놓고 2년 인가 지나서 진짜로 북해도에 여행을 갈 수 있었다. 열흘은 아니고 4일이었고, 호텔은 호텔이었지만 닭장보다 조금 더 큰 비즈니스 호텔이어서 창문은 열 수가 없었지만, 그리고 노트북은 아마 저 글을 쓸때 가지고 있었던 걸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작은 노트북은 재작년에 북유럽 여행을 가면서 샀으니까. 아, 봄이 오기 전에 다시 또 저기로 여행을 가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일은 딱 마무리를 지을 수 없고, 계절은 슬렁슬렁 지나가고… 뭐 그렇다.
# by bluexmas | 2010/01/24 08:36 | Life | 트랙백 | 덧글(12)
그러다보니 오글오글한 글도 자주 올리게 되고ㅎㅎ
제가 잠들기 전에 항상 하던 공상이라 괜히 반갑네요^^;
그래서 가끔, 자기 싸이 방문자수 올리려고 모르는 사람에게도 무조건 아무개야 반갑다~ 겨우 찾았네~ 하는 식의 낚시 방명글에도 안 낚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의 광고글에 비하면 그건 양반이지만요;
전나무, 자작나무 둘러싸인 숲 속에 있는 호텔이었고,
아무도 밟지않은 깨끗한 눈이 수북히 쌓여있었고 너무도 조용한 곳,
밤에 호텔에 도착해서 들어서자마자 창가의 커튼을 열었는데…
바깥 풍경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 같더군요.
정말이지 이 세상 같지 않았어요…보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달빛조차 환한 것이…
드뷔시의 ‘달빛 소나타’와 같은 그런 풍경.
커튼을 열어두고 침대에 누워 바깥은 바라보느라 밤을 새웠던 기억이 납니다.
북해도에서 내가 만났던 그 풍경이,
블루마스님이 싸이에 쓴 글과 같은 풍경이 아니었을까…멋대로 상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