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늦은 밤 만두와 포도주
잠깐 밖에 나갔다가 늘 봐두었던 역 근처의 만두집에서 왕만두를 네 개 사가지고 왔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음식을 안 먹었다. 내가 늘 음식 사진이며 글을 올리니까 어떤 사람들은 매끼 칠첩반상이라도 차려 먹는 건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음식을 해서 먹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 뿐이고 다른 날들은 보통 대강 먹는데, 요즘은 그나마도 잘 안 먹는 와중에 오늘은 아예 밥 자체를 안 먹고 뭔가로 연명만을 했다. 뜨거운 밥을 한숟가락 드는 생각을 하면 머릿속에서 입맛이 싹 가시는 요즘이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올 여름은 뭔가 좀 심하다.
어쨌든, 나는 만두라면 사랑하니까, 네 개에 삼천원이라는 왕만두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마트에서 요즘도 할인판매하는, 한 병에 육천 구백원짜리 G7이라는 초싸구려 멀롯을 한 병 사온다. 종류별로 다 한 번씩 마셔봤는데 오오, 싸구려인데다가 멀롯이라는 느낌은 뭔가 전혀 들지 않지만 이 분식집 특유의 고기, 혹은 갈아 넣은 무 냄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느낌이 은근히 나쁘지 않다. 이거라도 꾸역꾸역 밀어 넣으니까 기운이 좀 난다. 아아, 올 여름 정말 빨리 갔으면 좋겠다. 어째 한 살 더 먹을 수록 더 심하게 여름을 타는 것 같다.
참, 만두는 당면을 잘게 다져 넣은데다가 다진 당근이며 파가 껍데기에도 살짝 드러나게 빚은 꼴이며 맛이 초등학교 이학년 때쯤 살던 동네의, 언제나 버스에서 내려 십 분 정도 집으로 걸어와야 했던 그 버스 정류장에 있던 만두집의 만두를 생각나게 했다. 그집 만두에는사방 1센치미터 정도로 깍둑썰기한, 기름기 없는 돼지고기가 한 덩어리씩 들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집 만두에는 아쉽게도 그건 없었다. 그러나 맛있어서 다음 번에 또 먹으러 가야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름드리 탱자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비닐에 한겹 싸고, 정육점의 고기덩어리마냥 신문지로 한 겹 더 싼 만두는 그 길 내내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
# by bluexmas | 2009/08/17 22:57 | Taste | 트랙백 | 덧글(10)
저는 좋은 독일 리슬링 이런 건 못 마셔봤지만, 그 종류의 미국산은 꽤 먹어봤어요. 특히나 오레곤이나워싱턴의 리슬링을 좋아하구요. 게부어츠라미너는 언제나 발음하기가 어려워서 쩔쩔매죠. 드라이한 화이트라면 언제나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전채와 함께 먹고 조금 풍성한 레드와 본식을 먹으면 끝내주죠. 알콜배가 조금 더 남아 있다면 포트와 초콜렛 케잌 정도면 낙원이겠죠T_T
비공개 덧글입니다.
십만원이면 이거 몇개를 사나요 징징~~
(저는 아주 어릴 때에 성탄 저녁을 강남역 티지아이에서 먹고 울분에 영수증 복사해서 전액 환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본사에 보내기도 했어요. 각잡고 비싼거 먹으러 갔는데 작은 것 하나가 틀어져서 기분 나쁜 그 상황, 저도 너무 잘 알지요^^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저도 요즘 밥은 쳐다도 보기 싫어요 고기반찬이 생기면 입맛이 돌까 싶어 고기를 사왔는데 변하지 돌기는 커녕 고기도 맛이 없네요..으으~
그나저나 어떤 만두인지 저도 짐작할 수 있는 글이예요 후흐흐^///^ 빚은 모양이 제가 생각하는 것과 같을 진 모르겠지만요
입맛없으면 고기 냄새도 싫게 느껴질때가 있잖아요. 요즘이 그런 듯… 그래도 저는 만두라면 얼마든지먹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