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의 에반 윌리엄스
에반 윌리암스? 물론 내 친구 이름은 아니다. 사실 뭐, 따지고 보면 친구가 아닐 이유도 없다. 술이면 다 내 친구니까. 사실 에반 윌리암스는 잭 다니엘스와 보다 더 친한 친구다. 비슷한 종류의 위스키니까. 싸구려인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싸구려라고 해서 꼭 나쁜 건 아니다. 비싼척 하는 싸구려는 재수없고 나쁘지만, 알아서 자기인 척하는 싸구려는 좋다. 에반 윌리암스는 그런 종류 가운데 하나다. 싸지만 가격에 맞춰 품질까지 저질은 아닌 술. 가끔 어떤 시름은 굳이 비싼 술로 달랠 필요가 없다. 이 정도면 족하다. 달지만 않으면 된다. 단맛이 강한 술은 골치아프다. 술은 써야 된다고 생각한다. 너무 써서 그래도 술 없는 삶의 시름이 훨씬 낫겠구나, 라는 생각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들 정도로 써야한다. 그 뒤에 찾아오는 알딸딸한 기분이 값싸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는 써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Villa M 같은 술은 나쁜 술이다. 너무 달아서 마시면 함께 하는 모든 맛이며 생각을 홀랑 덮어버린다. 현실이 단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거품마저 있다. 달콤한 인생의 행복한 순간마저도 Villa M 앞에서는 너무 달다며 도망가버린다. 그런 다음에 찾아오는 알딸딸함은 왠지 속임수 같다. 단 술을 마시고 취하면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술은 달아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지고 있는 술들 가운데 가장 쓴 술을 골라 마신다. 그 이름은 바로 에반 윌리암스.
생각을 해 보니 에반 윌리암스와 잭 다니엘스는 친구라기 보다, 만나면 서로 결투해서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앙숙은 아니었을까? 비슷한 가격대에다가 비슷한 전통을 가진 위스키니까. 물론 유명세로 따지면 잭 다니엘스가 훨씬 잘 나가지 않나 싶다. 술가게에 가면 가글액처럼 양치질하는데 쓸 수 있을만큼 큰 통의 에반 윌리암스를 판다. 삶이 쓰다고 느껴질 때면 그 큰 통을 품에 안고 와서 그 삶이 쓰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뇌의 일부를 술로 헹궈낸다. 그 쓴 맛을 톡톡히 본 뇌의 주름은 그 다음부터 웬만하면 삶이 쓰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그러나 나의 병은 양치질을 하기에는 너무 작다. 어쨌든 오늘은 마신다. 뇌의 주름이 너무 자글자글해서 슬픈 새벽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마신다니까.
# by bluexmas | 2009/08/05 01:12 | Taste | 트랙백 | 덧글(12)
블마스님 포스팅보니 남은 리슬링을 마셔야겠어요.
사실은 먹던 앱#트도 한 병 있습니다만…
비공개 덧글입니다.
더워서 편하게 자기가 힘드네요. 확실히 여름에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땐 허영심만 기똥차선 “난 이만큼 마셔도 안 취한다” 라는 이상한 우월감에 빠져선 마셨어요
지금은 써서 아예 안 마시지만..술의 쓴맛을 즐길 수 있었으면 인생의 맛이 좀 더 풍요로워 졌을지도
전 나쁜 친구들하고만 어울립니다. 단 와인이 좋아요.
친구도 즐거우려고 사귀는것인데, 쓰고 괴로우면 무슨 낙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