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충동적으로 돌아보는 최일민

아무개 블로그님의 이현석 관련 글을 보고 있노라니, 최일민이 생각났다. 어차피 나에겐 이현석은 잊혀진 기타리스트니까. 그 분의 블로그에 남긴 답글에도 언급은 했지만, 일단 이현석이 잊혀진 건 대다수의 연주자들에서 볼 수 있는 창작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집이 1집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좋았지만, 1집에 수록된 곡의 자기 복제와 같은 곡들이 있었으니까. 결국 관심을 끊게 만들었던 3집은 정말 지루한 2집의 자기 복제였을 뿐이었고. 거기에다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현석은 노래를 하지 말았어야만 했다. 물론 ‘학창시절’ 이 반짝 인기를 얻어 가요 프로그램에도 나오는 등, 단기적인 앨범 판매에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기타리스트 아닌 가수로 기억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그래서 무슨 압력이라도 있었는지, 3집에서는 ‘머리가 길어 슬픈’ 이라는 학창시절과 별 다를 바 없으나 더 구린 곡을 내놓았고, 나는 그 이후로 이현석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이현석에게 관심을 껐으므로, 다시 최일민에게 돌아와 보자. 최일민의 행보는 이현석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이현석이 처음 등장했을 때, 잘 알려진 것처럼 왕년에 메틀음악을 하셨다는 이승환은 그를 좋아했는지 나중에 실황앨범으로 발표되는 전국 투어인지 공연에 그를 기타리스트로 데리고 다녔고(그래서 듣다 보면 무슨 노래 중간, 짤막하게 기타리스트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솔로에 피킹 하모닉스를 많이 넣은 이현석의 솔로를 들을 수 있었다), 라디오에 음악손님으로 나오면 Sky High와 같은 곡을 종종 소개했다. 이에 반해, 최일민은 90년대 초 중반에 데스 메틀을 소개하는 글을 핫 뮤직에 써서 나름 평론가가 되신 이 원의 글로 역시 핫뮤직에 소개되었다. 그 당시 그가 주목을 얻었던 이유는, 이현석을 비롯해 옛날 밴드 스트레인져의 임덕규나 안회태 등등의 잘 나간다는 속주 기타리스트들이 모두 잉베이 말름스틴, 마이크 바니와 쉬라프넬 레코드로 대표되는 클래식 음악에 기반한 속주를 선보였던 반면, 그의 음악세계는 누노 베텐코트 등등으로 대표되는, 16분 음표의 당김음, 그리고 리듬감이 잘 살아 있는 리프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과 달리 개, 소, 말 모두가 때려 죽어도 솔로하겠다며 화성 단음계 따위를 후려대던 시절에, 그는 어쩌면 보다 밴드 중심적으로 들릴법한 음악을 들려주었던 것이고, 이는 나처럼 벌써 국내 헤비메틀 음악계에 질려버린 사람에게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돌아보면 그때 당시에 익스트림과 같은 밴드가 잘 나갔고 또 결과 많은 기타 지망생들이 화성 단음계와는 조금 다른 세계의 기타를 찾기 시작했겠지. 어쨌든, 그래봐야 세 장 밖에 없는 최일민의 음반을 한 장씩 들춰보면,

최일민 1집(1994)

1993년이었는지, 94년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당시 네이팜 테스 등등을 거느리던 영국의 회사 Earache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메틀 음악을 좀 야심차게 들여와 보려고 했던 우리나라 회사 Metal Force(선경의 자회사였나? 역시 기억이 가물가물…)가 크래시를 위시한 우리나라 스래쉬 메틀 밴드들의 앨범을 내주던 희망찬 시절, 최일민도 데뷔 앨범을 메틀 포스에서 발매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는 뽀글이 파마가 메틀 음악 하는 형들한테는 대세였는데, 최일민은 긴 생머리에 나름 꽃미남 분위기여서 얼굴 사진도 껍데기에 크게 박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인터뷰에서도 보컬이 들어간 곡을 넣기로 타협을 했노라고 밝혔는데, 그래서 음반의 전체 분위기와는 썩 잘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도 비슷비슷한 보컬곡들이 들어가 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었다면, 그가 직접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는 점. 어쨌든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기타리스트라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 이후 최일민은 오랜 시간 동안 앨범을 내지 않, 아니면 못했고 그 뒤에 나온 앨범에는 보컬곡이 담겨있지 않았다.

각설하고, 음악을 들어본다면… ‘화성 단음계 아니어도 내가 스윕 좀 하지’ 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 약 1분 동안 슬라이드를 간간이 섞어 코드나 음계 사이를 이동해서 실제 치는 것보다도 더 빠르고 유연하게 들리는 스윕을 들려준 뒤 등장하는 ‘Show me something good’은 나처럼 아는 기타리스트가 누노 베텐코트 뿐이어도 마음 놓고 들먹일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을 느낄 수는 곡이다. 물론, 여기에서 영향이라고 하는게 복제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다. 곡이 시작됨과 동시에 다 죽여버리고 싶었는지 상당히 기술 과시형인 스윕을 들려주기는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이 곡은 물론 앨범 전체에서 연주 기술은 꼭 필요한 걸 표현하는 정도 외에는 쓰이지 않고, 그게 바로 정말 잘 치는 기타리스트였으면서도 실제 연주에서나 인터뷰 등등에서 보다 밴드 지향적인 시각에서 기타의 접근을 시도한다는 누노 베텐코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벌써 15년도 더 전의 얘기니 지금은 쓰는 나조차도 믿을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우리나라엔 저런 스타일의 기타리스트가 없었다.

어쨌든, Show me something good이 그렇게 16비트 당김음이 돋보이는 리프 위주였지만, 나머지 곡들은 보다 더 다양한 스타일이었다. 다분히 전형적인 8비트 다운피킹 리프를 담고 있는 ‘Thrust’나 ‘Tempest’와 같은 곡도 있었고,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좀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는 ‘Story of the Sea’같은 느리고 잔잔한 곡, 그리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여자친구가 헤어질 때 자기를 위해서 곡을 써달라고 해서 썼다는,  Show me something good 보다 리듬감이 더 좋은 ‘Farewell my love’ 같은 곡, 3집에서 보다 시대에 맞는 스타일로 재편곡되어 실리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어쿠스틱 기타의 리듬 기타가 나름 유행하던 얼터너티브 같은 분위기였던 ‘Walking in the rain’까지, 지금 들어도 즐겁게, 멈춤없이 들을 수 있는 좋은 곡들이 가득 실린 앨범을 내고, 나름 기대를 했지만 최일민이 공연을 했다는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이 나는 그를 잊게 되었다.

2집 Garlic Butter (2000?)

그렇게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가 대체 어떤 경로에서 다시 기억해냈는지는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각종 기타 연주 앨범만을 전문 취급하는 온라인 판 가게 Guitar Nine을 통해 미국에서도 그의 앨범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들었던 음악은 그렇게까지 해서 샀던 것에 비하면 많이 실망스러웠다. 바로 위에서, 첫 번째 앨범이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로 가득차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2집은 그와는 정반대로, 그리 길지도 않은데 정말 비슷비슷한 분위기의 곡들로 가득했다. 너무 오랫만에 앨범을 내서 그랬을까? 1집에서는 처음 시작 딱 1분 동안만 과시하던 기술을 앨범 전체에… 그래서 앨범은 리프고 솔로고 할 것 없이 음표의 남발인데다가 설상 가상으로 초퍼를 너무나 사랑하는 베이시스트 임철재를 끌여들여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엄지로 짓이겨대는  난리 법석 베이스가 어느 노래에나 넘실거려 기타를 듣는데 거슬리는 수준에까지 이른다(임철재가 뛰어난 베이시스트라서 그의 연주를 넣고 싶은 마음에 수록했다는 베이스 솔로 ‘Thumb Attacker From Mars’는 넣을 필요 전혀 없었던 군더더기. 베이스 톤도 정말…). 중간 이상은 가지만 1집의 수준을 생각했을때 실망스러웠던 앨범. 그의 창작력이 1집을 시작으로 마지막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그나마 ‘Slumber Land’ 정도가 건질만 한 곡, 하지만 왜 그렇게 내 귀에는 음계와 맞지 않는 음들이 계속해서 들리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어울리지 않는 레게머리와 검정 일색의 옷, 그리고 듣도 보고 못한 ‘문화강국’ 이라는 레이블로 미뤄 짐작해보건데 그렇게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 앨범을 냈을거라고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3집 Guitar Recipe (2005?)

역시 또 한동안 잊고 살았다가, 어디에선가 2집의 추악한 레게파마를 풀고 옛날의 생머리로 돌아와 펜더-그전 그의 기타는 아이바네즈, 모델번호가 뭐였더라? 찾기 귀찮다…)를 든 그의 사진을 보고, 이번 앨범은 뭔가 또 다른 분위기가 아닐까 그저 추측만 했었다. 62 빈티지였는지 그냥 아메리칸 혹은 아메리칸 디럭스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쨌든 펜더에 디마지오 픽업이 약간 옥의 티였기는 했지만. 어쨌든 2집이 실망스럽다고 또 근 5년 만에 내준 앨범 한 장 못 사줄리는 없는 노릇, 표지가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 앨범은 그가 1집에서도 보여준, 기타리스트 이전에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10년도 더 넘은 뒤에 상기시켜주는, 그런 앨범이었다. 1집에서 비교적 다양한 스타일의 곡을 들려준다고 위에서 언급했던가? 그 앨범에 실린 곡들이 다양하기는 해도 전부 기타를 위주로 하는, 헤비 메틀과 락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앨범의 곡들은 그 범주를 넘어선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곡 주 선율의 무려 플룻 솔로가 막판에 등장하는 ‘Morning Blue’를 비롯, 그의 본래 스타일에 가깝다고 얘기할 수 있는,  16비트의 리프가 돋보이는 ‘Zeldastyle’이나 ‘Last Bullet’ 같은 곡도 있고 1집에서의 Thrust나 Tempest와도 비슷한 ‘No More Miracle’, 제목을 모른채 곡만 들어도 Stevie Ray Vaughn 생각이 나는 ‘Song For S.R.V’나 심지어는 라틴 분위기가 나는 ‘Whisper of Breeze’ 까지… 이렇게 곡들도 다양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곡의 스타일에 맞게 배치된 각종 관악기나 타악기였다. 달리 말하자면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헤비 메틀이나 락의 범주에 얽매이지 않는 편곡 능력이라고나 할까? 대체 그게 뭐 대수냐, 우리나라에 그런 음악가가 널리지 않았냐… 라고 누군가 말할지 모르겠지만, 본인의 우리나라 헤비 메틀 음악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2002년 정도에 머물러 있는 걸 생각해 볼때, 요즘 세대는 어떨지 몰라도 저 옛날 세대인 최일민이, 그것도 5년에 한 번 정도 낼까말까한 앨범을 통해 이렇게 발전된 모습을 보여, 아니 들려준다는 사실이 내게는 정말 놀랍다. 이 앨범은 단지 하나의 기타 앨범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안타까울 정도다. 그 틀에 매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런 걸 일일이 집어내고 있는지는 아직도 좀 의심스럽지만, 가장 최근에 나온 세 번째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옛날 앨범들에 비해 정말 힘을 빼고 편하게 연주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구리고 또 구린 것이 미덕인것처럼 느껴지던 우리나라 헤비 메탈 혹은 기타리스트들의 바닥에 그래도 참 돋보이는 존재였는데, 5년은 아니라도 3년에 한 번 정도는 앨범을 내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벌써 40이 다 되었는데 앨범 겨우 서너장 내고 사라지면 너무 아쉽지 않을까.

 by bluexmas | 2009/05/20 09:12 | Music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by 옥상땐스 at 2010/05/14 11:15 

여기 저기 잘 돌아보고 갑니다. 최일민 참 오랫만에 듣는 이름이라서 반갑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5/16 00:00

네, 요즘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찾아보지 않았거든요.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