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일기(23)-moving for moving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만으로 압도되어서 머리만 미친 듯이 돌아가고, 몸은 그저 얼어붙어버릴 때가 있다, 아니 많다. 그럴 때일 수록 눈을 딱 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움직여야만 한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야심많던 누군가가 끊어버렸어야만 했던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한다.
…라고 희망하면서 몸을 조금 움직여보았다, 아주아주 조금.
오후에 지하실에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내려가서 눈에 뜨이는 대로 쓸데없는 물건들을 쑤셔넣었다.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몰라, 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둔 물건들의 99.99%는 사실 내 삶에 다시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이고, 나머지 0.01%는 정작 필요한 때가 되면 그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 두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어서 다시 산 다음 또 다시 그것들이 필요없어진 다음에야 찾아내고 두 배로 절망하게 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다 쓸어다 버려도 아쉬울 건 없다. 가격표를 떼어 버린 다음에도 영원히 딸려올 기억만 두 눈 딱 감고 무시할 수 있다면. 그러나 사실 기억이 눈을 감는다고 해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았던가…
물욕없는 삶을 사는 건 사리가 나올만큼 자기부정 또는 수련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철저히 불가능하니까, 그건 아예 바라지도 않지만 필요 없는 걸 잘 버리지 못하는 습관만큼은 정말 버리고 살고 싶다. 나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할 때면, 언젠가 머나먼 옛날, 아직도 이유를 모르는 친할머니의 서울 이사 기억이 떠오른다. 가족들은 이사 전날인가 거들러 예산 집에 내려갔는데, 그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었다. 아니, 할머니는 준비가 다 된 것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으셨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모든 물건들이 가지고 서울로 올라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엄청나게 화를 냈었다… 이십 년은 족히 된 기억이구나.
그냥 눈 딱 감고 버릴 수 있는 건 오히려 처치가 간단한데, 그렇지 못한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나는 대체 어쩌자고 한정 아닌 한정 판매 레고 스타워즈 시리즈 따위를 사들였을까? 아주 빠른 순간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당시 무슨 정서로 살았었는지 떠오른다. 아?그랬었지? 그 정황은 이해가 가지만 어쩌자고 내가 그런 것들을 사서 포장도 뜯지 않고 쟁여놓았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주어버린다고 해도 그 주어버리는 과정까지가 매우 귀찮을 법한 그런 물건들… 사람을 찾아서 어딘가에 담아 우체국인지 어딘지에 들러서 주소를 쓰고 돈을 치르고 보내 버리는 그런 과정을 무슨 플로우 차트나 아니면 최근에 본 면허 시험에 나왔었던 건축 시공일정 관리를 위한 선형 다이어그램 따위에 대입시켜본다. 그러면 그것 아니고도 수백만 가지는 될 것 같은 해야 될 일들이 머릿 속에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럼 생각하지 않고 몸만 움직이겠다는 나의 희망은 곧 사그러든다. 지하실에는 먼지가 가득하다, 곧 목이 매캐해진다. 기침을 하다가 큰 쓰레기 봉투를 가득 채우고서는 물러난다. 작년 여름에 산 잔디깎이가 검정색 왕 바퀴벌레와 같은 자태로 웅크리고 앉아서 ‘이봐, 나는 얼마에 팔면 될 것 같냐?’ 라고 묻는 것과 같은 환영에 휩싸인다. 250불 주고 샀는데 99불이면 되겠어? 그럼 네 가치가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생각해? 너 역시 나의 혹이라니까… 나는 돌아오는 여름에 이곳에 없어야만 하거든. 일요일 늦은 아침에 일어나 잔디를 깎고는 창문을 활짝 열고 오후 한 시 반에 시작하는 야구 중계를 보다가 소파에 누워 깜박깜박 잠들었던 것도 나름 달콤했는데, 이젠 그것도 추억이 되어가는건가. 올 여름엔 또 어디에서 뭔가를 하다가 소파에 누워 졸게 될까? 소파는 들여놓게 될까? 앗, 그러고 보니 소파도 팔아야만 할 것 같은데… 그건 좀 오래되었으니 그냥 어딘가 줘 버리는게 속편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또 어디에? 오, 생각은 끝없이 이어진다.
혹시라도 집을 못 팔게 될 경우에 대비해 융자금이라도 적게 내어 볼까 재융자를 알아 봤더니 나는 무직이므로 재융자 불가. 뭐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전화번호부 몇 군데를 뒤져 공인중개사에게 전화를 해 보니 가격을 후려치면 팔 수 있을거라고.그렇다면 얼마나 후려치면 될까? 여기에서 뭔가 품었었던 그럴싸한 삶에 대한 꿈이 확 깰 정도로만 후려치면 될까? 그럼 되겠지 뭐.그것보다 더 세게 후려쳐서 앞으로의 삶이 어려워 질 정도로 뇌에 손상을 입게는 하지 말아야 할텐데, 그렇다면 또 누구에게 후려쳐달라고 부탁하면 될까… 전 회사의 누군가가 아무래도 좋을 듯.
새벽 한 시엔가, 친구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보았다. 딱 두 마디. Where are you? How are you? 앗, 그러고 보니 이 아이폰은 2년 계약이 되어 있는데, 위약금을 내고 끊는다고 하면 이건 이제 전화기가 아닌 아이팟 터치가 되어 나를 따라 들어가서는 일정관리나 기타 잡다한 것들을 위한 용도로 쓰이게 되는 걸까? 이거 봐, 생각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니까. 그리고 그 두 마디 물음에 대한 답은 통틀어 단 한 마디, I don’t know.
…but I can’t answer to him like that. So I will text him ‘fine’, when I wake up in the morning. Or I will just forget. Whatever.
# by bluexmas | 2009/02/24 17:33 | Life | 트랙백 | 덧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