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일기(6)-마지막으로 찾아간 회사

 실업일기가 난중일기 같은 종류와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작은 전쟁을 치르는 듯한 기분이라서 뭐 그게 그것일것만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총알이나 화살, 포탄 따위가 날아다니지는 않지만 시간과 나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2. 이 구질구질한 개인 재난에 관련된 얘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손님이 조금 더 많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실직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모여드는거 아냐? 아 이 새끼 평소에 마음에 안 들었는데 실직했다니 대체 무슨 얘기를 쓰나 보자, 뭐 이런… 그런 생각하시는 분 있으면 시원하게 답글이라도 한 번 남겨주시는 것도…

그럼, 오늘의 실업일기.

어제 새벽까지 포트폴리오를 몇 페이지 만들고, 오늘은 늦잠을 자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오후에 회사에 가야 된다고 생각하니 잠을깊이 잘 수 없었다. 결국 정오께에 일어났지만, 아홉 시부터 몇 번이나 깨어나서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왠지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오늘 회사에 가야만 했던 이유는, 행정적인 절차를 끝내기 위해서였다. 막말로 내가 회사의 일원이 아니라는데 동의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면 몇 주치의 급여와 바꿔주는… 내발로 나왔어도 예전에 다니던 회사 근처에 가거나 같이 일했던 사람이랑 마주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난데, 쫓겨난 회사에 내발로 찾아가는 건 이유가 어쨌든지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차이고 나서 자주 놀러갔거나 이별을 통보받은 장소 같은데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랑 비슷할까? 물론 내가 회사를 누군가처럼 사랑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그래도 비슷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돈>사랑,이라서? 으음…)…

시내로 내려가기 전에 차를 맡겼다. 작년 가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차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차 값의 40%-이번에 들 비용까지-에 가까운 돈을 수리비로 삼켰다. 꿀꺽꿀꺽 염치도 없이, 게걸스럽게. 이번에도 꽤나 돈이 많이 들거라고 해서, 이제 차 고치는 건 그만! 이라고 생각하고 옛날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차 사양을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그 다음날 나는 실직자가 되었고 선택의 여지는 없어졌다. 고칠 돈이라도 있으면 다행인거지 뭐. 어쨌든 차를 맡기고 다른 녀석을 빌려 시내로 향했다.

차를 바꿔타기 전에 주차카드를 챙겼으나, 예상했던 것처럼 카드는 죽어있었다. 20분에 2불이라 비싼데… 빨리 처리하기로 하고 인사과로 향해서, 늘 친하게 지내던 월급/복지 담당 아줌마 직원 K와 서류를 주고받았다. 내가 받게 될 돈은 실업자가 되기 직전 2주 에서 하루를 뺀 72시간의 급여와, 작년에 쓰지 않고 남겨두었던 휴가 25시간에 상당하는 돈, 그리고 퇴직금이라고 부르기 조금 힘든 쥐꼬리만한 돈 약간. 보험은 이번 달 말까지는 이어질건데, 그 이후엔 월 300불을 내고 유지할 수 있고… 기타 등등. 그것말고도 은퇴자금이나 세금 등등에 관련된, 미리 준비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고, 포트폴리오에 필요한 이미지를 얻기 위한 프로젝트 목록을 건넨 다음, 자리를 떴다. 내려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올라가면서 잠깐 섰던 엘리베이터에 같은 팀 애들 둘이 타고 있었고, 나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아는체 하고 싶지 않아서 멀찌감찌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또 그 애들이 나를 봤는지 아는체를 하면서, “Hey, please don’t forget us!” 라고 얘기했다. 글쎄, 내가 그들을 잊는게 빠를지, 아니면 그들이 나를 잊는게 빠를지… 어떻게든 일상의 쳇바퀴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은 멀어지고 또 잊혀지게 되어 있다는게 내 생각이라서. 그리고 솔직히 저 사람들이 나를 빨리 잊어줬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억되면 밤에 잠이 안 올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다들 내 얘기를 한 마디씩만 해도 내 귀에 들어오는 얘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잠이 안 올 정도…

내려 온 김에 M 선배를 보고 가려고 생각했는데 핸드폰은 안 받고, 회사 전화로는 걸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집으로 향했다. 주차요금 내기도 귀찮고… 그렇게 공식적으로는 마지막인 회사 방문은 짧게 끝나고, 나는 몇 군데에 들러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어디에 자리가 났다는 메일을 보내서, 그걸 받고는 마음이 좀 급해지기 시작했다. 내일 하루 정도는 집 밖에 안 나갈 생각이다. 실직자일때 또 실직자만 할 수 있는 것도 좀 해봐야지.

참, 회사를 안 나가게 되어서 뭐가 가장 좋지? 생각해보니 매일매일 청바지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걸 생각하니까 갑자기 너무너무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아, 행복해 T_T

 by bluexmas | 2009/02/04 11:51 | Lif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at 2009/02/04 21: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2/05 10:03 

하하, 이 블로그의 이면에 워낙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보니 절 미워하는 사람도 꽤나 많다고….^^

 Commented by liesu at 2009/02/05 23:04 

실업일기를 쓰시면서 사람들이 더 자주방문하기 시작했다니…;; 스트레스로 몸 축나지 않게 조심하세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2/06 16:20 

아하 놀랍죠? 불행이 빚어내는 얘기를 사람들이 더 좋아하나… 몸 안 축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