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엮은 바다
800번.
(전략) 열, 다시 열, 그리고 둘, 하나, 여덟, 전부 더하면? 서울로 전화를 걸려면 이렇게나 많은 수자를 눌러야만 했다. 먼저 국제 전화 선불카드 서비스 접속 번호 열 자리, 카드 번호 열 자리, 그리고 국가 번호 두 자리, ‘0’을 뺀 서울 지역 번호 한 자리, 그리고 매장의 직통 전화 번호 여덟 자리. 그러니까 전부 합하면 서른 하고도 하나, 수자가 아니어서 더하지 않은, 카드 비밀 번호와 통화를 원하는 번호 다음의 별표까지 합치면 서른 하고도 셋. 언제나 지금 이렇게 내가 마주 하고 있는 바다 건너에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하려면 이렇게나 많은 수자의 담을 넘어야만 했다. 그게 귀찮아서 혼자 마음에만 담았다가 버린 이야기가 사실은 지난 몇 년 동안 수없이 많았다. 사람에게 다가가는데 이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싫어서, 그렇게 많은 수자를 쉬지 않고 눌러야 되는 게 싫어서, 또 그렇게 수자를 쉬지 않고 누르면서 나는 삑삑거리는 소리를 너무나 듣기 싫어서. 급한 마음에 잘못 눌러, 나는 세 번이나 전화를 처음부터 다시 걸어야만 했다. 터치 스크린의 수자판은 쓸데없이 민감했다. 네 번째, 남은 시간은 두 시간 삼십 육 분입니다. 차가운 목소리에 비해 남은 시간을 분 단위까지 알려주는 꼼꼼하고 친절한 기계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 뒤,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박재은입니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바로 전화기의 스피커를 틀었다. 파도와 바다는 오늘 마침 서로 경쟁하듯 으르렁거리고 있어서 그녀가 전화기 너머에서 소리로 보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바다의 소리…. 파도의 소리는 씨실, 바람의 소리는 날실. 마음에, 들어요? 라고 물어보려는 순간 전화기를 통해 낮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낮은 흐느낌 소리는 지금 이 순간 세상의 전부를 채우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의 씨실과 날실의 소리를 어깨에 목마 태우고 비틀비틀, 한 발짝씩 바다로 향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와의 사이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그녀에게 말했던 그 바다는 이제 그녀와 나 사이에 가로 놓인 다리가 되고 있었다. 소리로라도 이제 그녀는 나와 이 바다에 대한 기억을 나눠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이 다리가 소리로만 엮여서 다행이에요. 누구들 다리처럼 까치로라도 엮였다면 그 머리를 밟고 당신에게 가는 건 어째 좀 야만스러운 짓 같아서 망설였을 것 같은데, 라고 농담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조금씩 커지는 흐느낌 소리에 나는 그저 전화기를 바다로 향한 채 들고 서서는 침묵을 지켰다. 어느 순간 그녀의 눈물 방울이 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보내는, 소리로 엮은 바다를 귀로 보면서 그녀의 눈에서 흘러 나와, 뺨을 타고 흘러 내려 진열장의 유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까지만 존재하는, 그녀가 그저께 팔았다는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보다도 내게는 더 아름다웠을 보석 같은 눈물. 그녀가 옆에 있다면 내 위안의 체온이 담긴 혀로 핥아 짠맛을, 지금 이렇게 서 있는 바다가 가지고 있는 그 짠맛을 느껴보고 싶은 눈물. 내가 전화기를 든 채 엉거주춤 향해 있거나 말거나, 또 그 소리를 듣고 건너 저 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울거나 말거나, 바다는 말 없이 무심해 보이고 또 들렸다. 아아, 정말 끔찍하게 통속적이잖아. 무심한 바다라니.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누군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사는게 원래 그런거 아니었어? 혼자 고고한 척 하는 건 정말 여전하네, 짜증나게.
# by bluexmas | 2009/01/11 14:47 | — | 트랙백 | 덧글(3)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