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겁게 보이는 일상풍경
아주 가끔 일상의 풍경이 헐겁게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처음 그런 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던 때는, 신체건강한 대한민국남성이라면 누구나 갔다오셔야만 한다는 군복무의 신병훈련을 마친 바로 뒤였다. 사실 신체건강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남성이라서 갔다와야만 하는 경우에 속했는데, 운 좋게도 6주 훈련을 마치고 하루짜리 외박을 얻게 되었다. 논산에서 수원까지야 뭐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니까, 부모님은 나를 집으로 데려가셨다. 집 현관을 들어서자 보이는 집의 모습이 굉장히 헐겁게 느껴졌는데 그건 강조하자면 낯설게 보이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마치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집의 풍경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다 그대로 있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 늘 습관처럼 조합하는 것과는 달리 그 풍경의 요소들이 조금은 헐겁게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수많은 픽셀의 조합으로 불어들이는 것에 그 느낌을 비교한다면, 나의 기억 속에서 조합되는 집, 그러니까 일상의 풍경이라는 것은 그 픽셀과 픽셀 사이에 아무런 틈도 없이 서로가 연결되어 하나의 완결된 이미지로써 간직되는 것인데 그 순간 내 눈에 보였던 것은 픽셀과 픽셀 사이에 맨눈으로는 발견하기 힘든 틈 같은 것이 존재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그 집합으로써의 이미지가 아주 약간 헐겁게 보이는 듯한 느낌. 순간 나는 내 머리통이 속에 간직한 단물을 빨아먹히기 위해 도끼로 한방 얻어맞은 열대 어느 섬의 코코넛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그 일상의 풍경이 헐겁게 보이는 순간엔 쨍, 하는 고통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정말 아주 짧았고 그 순간 이후로 모든 것이 예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틈도 없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완결된 이미지로.
그냥, 이번에 집을 꽤나 오랫동안 비웠다가 돌아왔더니 막 문을 열고 들어섰을때 같은 느낌이었다는 얘기를 남기고 싶었다. 십 이년 하고도 거의 반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대략 2년에 한 번 정도 한국에 들어가서 본가에 가도 그런 느낌을 느끼지 못해서 이젠 그런 느낌과 나와는 인연이 끝난거로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맞는 도끼는 더 아팠다. 쨍하니 아픈 이마를 움켜쥐고 블라인드를 쳐다보니 꼭 처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꽤나 많이 헐겁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번엔.
# by bluexmas | 2008/09/18 13:12 | Life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