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법 세계로부터의 환상(2): 환상에서 현실로
집에 온지 겨울 이틀째, 아침 여섯시에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아침부터 뭐 그렇게 바쁜일이 있냐고 한 마디 하시고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십 여년 전 대학시절 통학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서울 여러 곳으로 향하는 버스가 없어서 집을 나서 수원 시내를 거쳐 시의 북쪽 외곽에 가서는 사당역에 가는 버스를 타고 사당역에서 왕십리로 가는 지하철을 타는, 도합 최소 두 시간이 걸리는 지옥과 같은 통학을 해야만 했었다. 생각해보니 그 때는 5호선도 뚫리지 않았을 때였다. 사당역에서 2호선을 타면 순환노선의 반 정도를 돌아 35분이 걸려 학교에 도착하곤 했는데, 그 시간을 조금 줄여보겠다고 사당에서 이촌에 가서 청량리로 가는 국철을 갈아타고 왕십리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봐야 한 10분 아끼는 셈인데 그래도 좋다고 늘 그렇게 학교를 다녔다.
과연 이렇게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고 언제나처럼 고속도로를 달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해보았다. 누군가는 나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냐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궁극적으로 그 용기는 그의 소심함이 빚어낸 모순의 열매였다. 전화번호도 알고 있겠다, 그냥 전화를 돌려서 왔으니 얼굴 한 번 보자, 라고 말하면 될 것을, 그는 결국 이 방법을 스스로에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전화를 해서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면 보나마나 숨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6주라는 시간은 짧지는 않았지만 끝이 정해져 있는 시기였으니 그 사이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고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사실 실체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물리적 실체, 그래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보다 마음 편안한 포기를 위한 방법이고 수순이었다. 뭔가 계속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뭔가 부산을 떨다니, 그것도 이 이른 아침, 아니 새벽부터, 시차에도 채 적응하지 못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그는 너무 엉뚱했다. 누가 목적지까지 다다르기 전에 붙잡고 대체 이 이른 아침에 어딜 가냐고 물어보지 않기만을 바랬다. 스스로도 너무 엉뚱하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회사나 학교에 간다고 거짓말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알고 있는 주소에 자리잡은 건물은 사무실이라기 보다는 가정집처럼 생겼으므로, 그의 예감은 조금 불길했다. 과연 이게 맞나? 가지고 있는 지도를 몇 번 확인했지만 틀릴 이유가 없었다. 대로에서 한참을 걸어들어가야만 하는 주택가의 어느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좁은 길은 다니기에는 불편하지 않아도 머물기에는 불편한 길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출근하는 시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지만 회사 같은데 다닐만한 생김새의 사람조차 지나가지 않았다. 결국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출근과 동시에 시말서부터 써야되는 시간까지 머무르고 나서야 그는 자리를 떴다. 생각해보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로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웃었다. 그러면서 두 어번 뒤를 돌아보았다. 좁은 길이 대로를 만나기 직전에 있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와인바를 눈여겨 보았다. 채 일주일이 지나기 전, 그는 다시 그 동네에 돌아와 있었다. 오후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일단 지난 번에 눈여겨 보았던 와인바로 향해 폴라로이드로 가게의 사진을 찍었다. 주인인지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가게 앞을 청소하고 있다가 사진을 찍는 그를 보더니 기자에요? 라고 묻는다. 기자는 무슨… 아뇨, 그냥 찍는거에요, 라고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길을 돌아서 대로변으로 향했다. 공중전화박스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쪽들을 넘겨가면서 번호 몇 개를 찾아서는 전화를 걸어본다. 마침 한 시간 내로 배달해주겠다는 가게가 있었다. 위치를 물어보니 지금 있는 곳에서 15분, 전화기에 사진을 올려 놓고서는 사진의 밑 부분 공백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섯시 부터’ 라고 적고는 가게로 향한다. 여자들이 겪는 불편만큼은 아니겠지만 신은 정장구두가 오랜 시간 걷는데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게까지 향하는 15분이 마냥 길게 느껴진다. 하필 오늘같은 날이 그가 일 때문에 한국의 다른 회사를 찾아가는 날이어서 정장차림이었기 때문에 옷이며 구두가 몸을 불편하게 하고, 또 마음마저도 불편하게 했다. 가게는 비싸게 생긴 건물의 1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동네가 다 그렇지 뭐.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나가다가 봤던 것도 같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이런 일을 하는 건 왠지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빨리 끝내고 나올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주인인듯한 여자는 말이 많았다. 봄이니까 화사하게 이걸 섞고, 또… 어차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할테니까, 라는 생각에 그는 별로 요구사항이 없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가 그걸 볼 확률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꼭 시간에 맞춰서 보내주세요, 이거랑 같이. 주소랑 봉투를 내밀고, 돈을 치르고 가게를 나섰다. 다시 15분을 걸어야만 했다. 바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까 사진을 찍을 때 그를 보았던 가운 입은 남자가 아는 척을 했다. 어차피 이른 시간이라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미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자기도 오랫동안 미국에 살다가 이런 바를 열고 싶어서 들어왔다면서 갑자기 많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절반은 곧 그가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상황 때문에, 또 나머지 절반은 어차피 그런 얘기는 미국에서 살았던 한국사람들로부터 귀를 떼어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주 듣는 종류의 얘기니까. 잔으로 파는 와인이 없었으므로 그냥 맥주를 시켰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는데 전화가 울린다. 가게였다. 배달을 했다는 확인전화였다. 한 시간만. 그 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기로 하고 계속해서 맥주를 마신다. 캘리포니아 남쪽에서 왔다는 주인의 말을 듣고 나니 가게의 붉은 색 기본의 인테리어가 캘리포니아와 스페인의 영향을 반반씩 받은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가게가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는 찰나 창 밖으로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가게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환상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반쯤 남은 맥주잔을 급하게 비웠다. 잔을 내려 놓는 순간 문이 열리고 있었다. # by bluexmas | 2008/08/18 11:45 | —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by passerby:D at 2008/08/19 00:05 그가 가게쪽으로 다가오고, 문이 열리고 그리고……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8/19 13:00 (…다음 편에 계속^^;;;) 사실은 다음편 쓰기 소심해졌어요. 쓰게 될런지… 잘 지내시죠? 좀 자주 들러주세요. 까먹잖아요. 블로그도 가지고 계신지 모르고.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