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듬다
서너해 전이었으면 매일, 하루에도 여러번을 오르락내리락했을 오르막길을 너무나도 오랫만에 오르던 그날,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고개를 숙이며 길을 오르다 평지로 접어들 무렵 고개를 드니 몇걸음 앞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얼굴 밑에 달린 몸통 및 팔다리도 함께. 못본척 옆길로 접어들이기엔 너무 가까웠고 사실은 옆길도 없었으니 그냥 마주치는 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오늘따라 나는 왜 고개를 숙인채 걸었을까, 마주치기까지의 거리동안 생각했지만 마음에 드는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이 덥고 습한 날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랬다면 발갛기보다는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이제는 별로 기억할 건덕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순간이 다가오자 내가 아직도 뭔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이건 뭐가 유통기한이 지난 플라스틱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떠한 이유로든지 간에 더 이상 쓸 수는 없게 되었지만 썩지는 않는 플라스틱 같은 기억. 어렸을 때, 그러니까 밤에는 어떻게든 이를 안 닦으려고 온갖 핑게를 대다가 잠들어버리는 나의 나쁜 버릇을 고치려고 엄마는 시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하늘색에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플라스틱 컵을 사오셨다. 그래서 나는 몇 년 동안 언제 그랬냐는 듯 이를 정말 열심히 닦았었다… 컵에 그려진 미키 마우스 그림이 닳아 없어질때까지는. 그리고 막상 그림이 닳아 없어질때쯤 되었을때 나는 벌써 다 자라서 예쁜 컵이 없이도 이를 미친듯이 닦는 철든 아이로 자랐으니 그림도 지워지도 몇 년의 세월에 처음 가졌던 플라스틱스러운 윤기도 잃은 컵은 결국 벽장 어딘가로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썩지도 않고 재활용도 못하는 플라스틱의 신세란 그런 것이다. 더 이상 쓰기엔 뭔가 마음에 들지 않고, 또 버리기엔 아깝고… 그래서 그렇게 어딘가 구석에 처박아 놓고 잊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이라도 하는 날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기억의 매개물이 되는 플라스틱.
그리고 그런 플라스틱 같은 기억이 있었다,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어서 벽장에 쳐박아두듯 잊고 있다가 어떤 순간이 되면 떠오르는, 썩어서 영영 사라지는 일이라고는 영영 일어나지 않는 그런 기억… 그러나 이 기억은 하늘색 미키 마우스컵처럼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박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의 웃음도 사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소리가 곧 나올 것처럼.
그냥,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오른손을 뻗어 그의 머리위에 얹고서는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건 거의 조건반사와도 같은 행동이었지만, 언젠가는 일상이었던 어느 토요일 오후 미어질 듯 사람이 들어차 움직이는 3호선 종로 3가 지하철 역에서 남들 다 보라는 듯 쭈그리고 앉아 풀린 분홍색 뉴 밸런스 운동화 끈을 매어주던 그런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아직도 뭔가 할 말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왜- 라는 말 정도가 하고 싶었다. 이런 상황이 오면 언제라도 주저없이, 막힘없이 쓸 수 있도록 오랜 시간을 두고 혼자서 연습해왔던 그 대사, 아직도 뭔가 할 말이… 그러나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사람들끼리 마주쳤는데 뭔가 말을 한다는 것도 사실은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로 오랜 시간동안, 그러니까 지금까지 연습했던 건 결국 침묵, 그러니 여기에서 연습해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상황, 그래서 손을 올려 언젠가는 닳도록 쓰다듬었던 그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just let go and move on, have we not already?
재활용도 용서가 된다면.
# by bluexmas | 2008/07/27 15:18 | —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