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고란 무엇인가
정말, 충고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충고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부정적인 의미가 섞여있다고 생각하니까. 누군가 나에게 충고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즉 나에게 무엇인가 결함이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 사람이 보기에, 그리고 생각하기에… 그리고 그 충고라는 것의 범위는 아주 얇게는 작은 행동 하나에서, 두껍게는 나라는 사람 자체나 내가 가진 삶에 대한 자세까지를 쓸고 지나가는 데까지 획장된다. 그리고 충고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두꺼워질 확률은 한국 사람들의 인간관계에서 굉장히 높기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결국은 수직적이니까, 아니 그 수직적인 성질이 확장되는 것이 우리들의 인간관계이기 마련이니까.
옛날에 잠깐 알았던 누군가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이라고 운을 띄우고 누군가 충고라고 할라치면 아예 ‘기분 나쁠 얘기라면 꺼내지도 마세요’ 라고 거절해버린다고, 아예 입도 열지 못하게 한다고… 나는 그렇게 할 만큼 대담한 사람은 못되지만, 가끔은 정말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돌아보면 언제나 나는 무리의 바닥에 속해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든 무리의 윗쪽에 속하게 되었을 때도 충고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뭐 후배에게, ‘내가 충고 한 마디 하겠는데’ 라는 얘기를 꺼내본 기억이 있었을까, 퇴근하는 길에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한참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와 말다툼하고 싸웠던 기억이야 충분히 있겠지… 그러나 그렇게 ‘내가 충고 한 마디 하겠는데’ 라는 말의 족쇄를 꺼내서 상대방을 일단 묶어 놓고 무방비상태에서 뭔가를 집어 넣어보려시도한 것은 그 마지막이 언제였나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충고를 듣는 것, 하는 것 모두를 싫어하는 사람이다(라고 믿고 산다…). 이 두 가지 상황에는 거의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1. 충고해서 받아들이고 달라질 상황이면 충고하기도 전에 벌써 달라졌다: 다들 성인이지 않을까?
2. 벌써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내가 조언을 안 구하는 건 아니다. 아니, 사실은 많이 구한다. 나에겐 자문단까지는 아니어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주저않고 물어볼 수 있는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근처에 가족도 없이 꼴랑 혼자 살다보니 어떤 일들은 혼자만의 생각으로 도저히 처리를 할 수가 없다. 그럴 때는 묻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말하면 듣는다.
3. 개개인의 삶이 너무나 다르고 또 복잡해서 그걸 반영하지 않은 단편적인 충고는 별로 의미가 없다: 나에게 그 ‘충고’ 라는 걸 하는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고,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가부장적인 체계 속에 몸담고 살고 있다. 그래서 그 충고라는 것의 많은 부분은 그러한 체계에서 남자라는 개체가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노하우와 같은 것일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일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뭐 이러한 종류의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런 종류의 것을 대부분은 실행에 옮기기에 나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삶의 본질과 너무 거리가 먼 것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 정말 몸을 안 아끼고 일을 너무너무 육체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은 완전 야근 불사형인데, 어쨌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해서 담배를 피우고, 운동 같은건 귀찮거나 시간이 없어서 하지 않으며, 야채나 과일도 거의 먹지 않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 당연하게도 잦은 피로감을 호소한다. 정기검진-잘 하지도 않지만-을 하면 언제나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결과를 받는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런 사람들은 직장에서의 성공=삶의 성공 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다(거듭 말하건데 전부는 아니다). 그러다보니 일단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것들은 거의 자동, 또는 본능적으로 뒷전으로 밀린다(그러나 그게 사실 야채나 과일 안 먹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 주변에서 야채나 과일 잘 먹는 남자, 특히 한국 남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런 사람들 정말 존중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생각하고 또 행동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한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하고 노력해도 나는 저렇게 직장에서의 성공=삶의 성공 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언제나 나에게는 이 삶이라는 것이 하나의 유기체 덩어리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직장이라는 건 이러한 덩어리진 삶의 어느 부분이지 전체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러면 또 누군가는 직장에서 성공해야 돈을 많이 벌고, 또 돈을 많이 벌어야 자신을 비롯한 가족이 행복하고… 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르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성공을 목표로 해야 그게 동기가 되어 일을 열심히 하고, 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누군가는 나를 의욕이 없는 사람으로 보거나, 그 단계를 넘어서면 어떠한 이유에서든 삶을 쉽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그렇게 말한다. 얘기가 거기까지 흘러가게 되면 나도 공격적인 인간이 되는 수 밖에 없다. 그건 말하자면 내 이성의 안전핀을 제거하는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 이런 얘기를 꺼내놓기 시작하면 나는 두서가 없어진다. 이러한 화제는 내가 이성을 지키면서 통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데 때로 어떤 종류의 충고는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일단 어떤 말이든 충고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나왔을 때 방어적으로 돌변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들마저 일단 넘겨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이자면, 사실 나에게는 회사에서 일 잘하고 뭐 이딴 것들을 떠나서 이만하면 전체적인 얼개를 보았을 때 삶을 그럭저럭 잘 꾸려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쓸데없는 믿음 따위가 있다. 내가 100% 나일 수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거대한 야망이나 성공에 대한 욕심 없이 내 능력을 보여줄 수 있고, 또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인정받고 받지 않고를 떠나서 주어진 일을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있다. 그리고 결국, 그런 믿음은 내가 무슨 회사에다가 죽을때까지 몸바쳐줬을때 나오는게 아니고, 그것을 비롯한 하나의 덩어리진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 비로소 거기에서 스며 나온다. 제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또 아침을 거르지 않는 것도, 점심 먹고 산책하는 것도, 그리고 적당한 시간에 야근을 끊고 30분이라도 달리기를 해주는 것도… 다들 작고 또 어떤 사람들에겐 그렇게 큰 가치를 주지 않는 삶의 요소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단지 회사에서의 성패로만 나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엔 내 삶은 너무 복잡한 개체라고 생각한다는 얘긴데, 요즘은 느끼기를 이런 나의 생각이 태도로 배어나오면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삶을 쉽게 산다, 와 같은 종류로 생각하게 만드는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아, 나는 삶을 쉽게 살려는 사람이야, 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삶이 정말 쉬워지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 by bluexmas | 2008/07/11 11:42 | Life | 트랙백 | 덧글(4)
비공개 덧글입니다.
스스로의 가치가 내 생활을 이끄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해요. 회사의 가치라면 몸을 바치든 게을러지든 이상한 결과로 흐르든, 일상의 척박함에 대해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있기 때문에.
blackout님: 뭐 저는 그런 사람들도 이해는 하는데, 저에게 강요를 하는게 문제인거죠. 저는 다른 사람의 삶에 상관 안 하는데…
산만님: 저는 충고를 미친듯이 듣지만 할 일이 없고, 또 할 생각도 별로 없어요. 할 사람도 사실 주변에 없거든요. 스스로의 가치가 생활을 이끄는 것, 정말 어렵죠. 자신의 의지로만 삶을 일으킬 수 있다면 정말 삶 자체가 헛되지 않은 것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