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난 뒤, 아주 짧은 환상
사이가 나쁘거나, 혹은 딱히 나쁘지는 않은데 소원한 형제자매가 어려움을 같이 헤쳐나가면서 좋은 관계를 회복한다거나, 아주 오랫동안 이러저러한 이유로 만나지 못한 가족이 드디어 만나게 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임창정이 모 영화에서 떠벌여 댄 것처럼 1:18내지는 뭐 1: 200 정도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주인공이 목에 칼이 꽂히기 일보 직전에 구원군을 만난다거나, 하는 종류의 영화를 보고 나면, 혹시 나의 삶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환상을 아주 잠시잠깐 품게된다. 그러니까 극장 건물에서 나와 고속도로를 타는 도로를 타기 위해 신호등에서 우회전을 할 때까지의 1분 30여초의 시간 동안. 이를테면 배운 것이라고는 자신을 정당화하지 못할때는 무조건 우기라고 부모에게 배운 인간들이 말도 안되는 걸 가지고 우길때 지원군이 짠, 하고 나타나서 나 대신 우기는 인간들의 싸대기를 때려준다거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지난 몇 년간의 삶이 말끔히 지워져있고 내가 아주 오랫동안 원하는 바로 그 삶-그동안 힘들었지? 라고 물어봐주는 인물의 등장-으로 바뀌어 아침을 혼자 서서 먹지 않아도 된다거나(내가 차리는 것 정도는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 그거야 뭐…), 금요일 저녁에 JCT 바에 가는 것까지는 똑같지만 알고 봤더니 혼자가 아니라서 유난히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던 지난 금요일 같은 날 바 아닌 밖의 탁자에 앉아서 ‘봐, 바람만 시원하게 불어도 기분 좋은 날이 있다니까’ 라고 아무 이유없이 흥분-그래서 ‘너 술 취했구나’ 라는 핀잔을 들을 수 밖에 없는-해가면서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라거나, 뭐 그렇고 그런, 아주 짧은 단편 영화 같은 환상 또는 공상과 같은 것들, 적어도 우회전할 1분 30초 동안 만이라도… 그 정도 환상도 없으면 대체 이 삶, 재미없어서 어떻게 살라구. 환상의 어느 한 순간이라도 현실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죽어라 사는게 이 삶인데.
# by bluexmas | 2008/05/19 11:19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