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on Flux (2005)-400년을 지탱해준 한 마디, ‘Can I see you again?’

영화의 시작은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쿨한 화면도 없이 가장 평범한 자막 몇 줄로 400년의 세월을 뛰어넘으려는 건방진 시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대략의 줄거리는 그렇습니다. 이천 십 몇 년인가에, 정체불명의 질병(industrial disease)으로 인해 인류는 거의 전멸하게 됩니다. 지구의 유일한 인간 생존 구역이 된 도시 Bregna는 높게 쌓은 벽으로 스스로를 자연 환경과 격리시켜 안전을 보장하는 구역인데,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고 행복한 이 도시에 계속해서 사람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한편 도시는 지난 몇 백년간 Trevor Goodchild와 그의 동생 Oren에 의해 다스려져왔는데, 상식적으로도 독재자 반대편에 저항군이 없을 수 없듯이 이들의 통치체제를 전복하려는 저항군 집단(Monican, 원래 설정에는 이들이 The Land of Monica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나봅니다)은 크고 작은 테러로 통치세력을 흔들고, 이 테러들의 중심에 최고의 요원 Aeon Flux(CharlizeTheron 분)이 있습니다.

MTV에서 방영되었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저같은 영화 무식쟁이에게조차도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미래의 세계가 그려진 영화가 한 두편도 아니고, 하다못해 감시의 모티브는 그 흔하디 흔한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조차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미래 세계는 당연히 통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려지며,  자유는 표면적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독재자든 뭐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존재(뭐 때로는 기계일때도 있었던가요?)가 있기 마련이며,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니까 꼭 흐르게 만들겠다는 저항군은 없다면 영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아마 거의 모든 영화에서 그들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참된 평화를 찾아야만 모두가 진짜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영화가 너무나도 뻔하니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단 저같은 무식쟁이처럼, 샤를리즈 테론 같은 미인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플롯이 개판이어도 꼭 보겠다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영화를 보러 간다는 이유를 웬지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대범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이 영화는 플롯에 작은 장치를 부여해서 조금 더 재미를 불어넣으려 노력합니다(저는 원작을 보지 않았습니다만 이러한 장치는 다 원작에서 빌어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부의 적과, 어쩌면 가져다 붙이기에는 저의 표현이 약간 황당할지도 모르는 전생의 인연(뭐 말하자면 deja vu, 旣視感 정도로 억지로 붙여볼까요? 그래도 약간은 찜찜합니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장치들 덕분에 영화는 밋밋해질 수 있는 위험을 약간은 제거한 채 여주인공의 아름다움과 깔끔한 비주얼로 별 무리 없이 흘러갑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을 바탕으로 줄거리를 조금 더 밝히자면 이렇습니다. 신분을 (당연히) 숨긴채 감시시설 파괴나 요인 암살과 같은 일을 수행하는 저항군 요원 이온 플럭스에게는 동생 남매가 있는데, 간만에 임무를 한 건 수행하고 동생들과 오랜만에 저녁을 함께하러 여동생의 집을 찾아간 그 저녁에 이미 동생이 주검이 되어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원인 불명이지만 하는 일이 일인지라 이온은 이 죽음이 통치자인 Trevor Goodchild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며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되고, 아주 적합한 타이밍에 이온에게는 트레버를 암살하라는 지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보기에 빡센 것 같으나 영화 내에서 10여분도 안 되는 시간만에 모든 장애물을 통과하고 트레버와 일대일로 대면, 마침내 복수를 할 기회를 맞게 된 이온은 희미하게 회상되는 기시감에 시달리다가 기회를 잃고 맙니다. 그래도 주인공이 여기에서 죽으면 영화가 안되기 때문에 멋지게 탈출한 이온은 다시 트레버를 만나게 되는데, 결국 두 사람이 오래전에 부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Bregna의 비밀은 모든 사람들이 다 클론이었고, 이들은 죽음 후에 복제되어 다시 태어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명맥을 이어왔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전의 그 질병 때문에 종족 유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400년 동안 복제로 생명을 유지한 트레버와 동생 오렌은 복제가 아니어도 종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 즉 임신을 다시 가능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를 실행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성공을 거두었지만, 트레버의 동생 오렌은 임신을 통한 종족 번식이 가능하면 클론을 통해 유지된 자신의 영속성이 종말을 맞게 될 것을 알고 트레버 몰래 피실험대상, 임신한 여자들을 죽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이유였고, 이온의 동생(Una)도 그렇게 살해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 오렌은 정보를 흘려 형이 암살되도록 꾸몄으나 실패했던 것이고, 다음 단계의 계획으로 형을 배신자로 몰아 정권을 빼앗으려 합니다.

의례적으로 권선징악 말고는 도저히 메시지를 담을 수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영화장르가 액션물인데, 이 영화에는 의외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 한 번 뿐인 삶의 소중함입니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이온은 항상 도시 상공을 선회하며 시민 감시 및 DNA보관(확신은 서지 않습니다만…)을 하는 비행선을 폭파시키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이상 클론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죠. 어릴적 ‘걸리버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하늘에 떠 있는 왕국인가 어딘가에 죽지 않는 사람들의 얘기가 나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거두절미하고 작가의 요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죽지 않고 살면 좋을 것 같은데, 세월이 흐를 수록 추해져만 가더라’ 라구요. 끝이 없기 때문에 시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없는 삶은 숨쉬고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와 궤를 같이 하여, 400년 동안 비행선에서 DNA를 관리해온 할아버지 연구원은 마침내 이온이 비행선을 폭파시키려 잠입하자 ‘이제는 이 삶에 지쳤다’면서 드디어 찾아온 끝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폭파된 비행선은 고도를 잃고 떨어지다 결국 스스로를 자연 환경으로부터 고립시켜 보호하고 쌓은 도시의 벽 한 부분을 허물고 맙니다. 결국 이 담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그들을 진짜 세상(자연)과 고립시켜왔던 물리적인 벽과, 또 다른 하나는 클론으로 세대를 거듭하여 본의 아니게 영속적인, 그러나 알맹이는 없는 유령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존재의 근원 자체에 대한 벽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비행선이 폭파되고 그 여파로 담이 무너지면서, 그 두 가지의 벽은 동시에 해소되고 이들에게는 정말로 살아있는 자연과의 왕래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그리고 단 한 번뿐이기 때문에 더 소중한 그런 삶이 기다리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갈등이 해소된 영화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시공간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지구로 되돌립니다.

…뉴욕이 아니면 유럽의 어느 도시라고 짐작되는 길거리에서, 처음 만났을 법한 캐서린(이온 플럭스가 트레버의 부인이었을때의 이름)과 트레버는 막 등을 돌려 서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서로 한 스무 발짝쯤 떨어졌을 때, 트레버가 캐서린을 부릅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Can I see you again?’ 이에 캐서린은 대답대신 활짝 웃고 두 어번 뒤를 돌아보며 트레버와 헤어집니다. 그리고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마치 저에게는, 트레버의 그 한 마디가 결국 400년이나 흘러 이들을 다시 만나게 했던 힘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클론에 클론을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죠. 언젠가는 그녀가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었을테니까요. 그들의 만남은 결국 400년이나 걸려 이루어졌지만, 클론도 안되는 하나뿐인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Can I see you again?’ 이라 물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만나지 못한채 아쉬움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품은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물어봤지만, 또 돌아보며 미소도 지었지만 대체 혼자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유로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상실의 아픔이 더 크게 다가오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영원할 수 없는 우리의 삶에 이렇게 가슴에 묻어야 하는 사람은 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아질 것인지…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그런지 즐기기 위해 본 액션 영화를 보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사족 1. 자막이 없이 영화를 보기 때문에 정보적인 측면에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게을러서 인터넷을 뒤져 정보를 잘 찾아보는 편이 아닙니다. 정보는 정보대로 원 소스를 보면 되는 것이고, 저는 간단하나마 감상문을 올리려 하는 것이니까요.

사족 2. 우리나라에서 개봉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미국에서 개봉되었던 또 다른 SF/액션물 ‘Serenity’와 이 영화를 비교 감상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비주얼의 측면이 그렇습니다. 두 영화 모두 미래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서양에서 알려진 동양의 이미지-선(禪, Zen)으로 대표되는-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 Serenity는 그것을 좀 더 키치적인 분위기로, Aeon Flux는 보다 미니멀리즘 적인 분위기로 발전시켰다는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나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미니멀리즘 풍의 노출콘크리트 건물을 주 배경으로 많이 썼습니다. 영화가 정신없기 지나가 대체 어떤 건축가의 작품인지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래도 가본적이 있던 독일 베를린 근교 소재의 화장장(Baumschulenweg Crematorium, 건축가는 Axel Schultes & Charlotte Frank)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무래도 가본 적이 있는 곳이라 그렇겠죠. 이 건물은 영화 중반쯤 트레버가 측근들과 회의를 하는 장면에서 선보입니다. 영화속에서의 건축 얘기가 나와서 기억을 더듬어 덧붙입니다만, 한편으로 비슷한 줄거리 (미래도시와 선택받은 부류, 통제…)’Gattaca(1997)’에서는 배경으로 나오던 건물들이 주로 모더니즘의 전성기에 지어진 것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동차도 빈티지였구요. 이 영화는 집에서 HBO를 키우던 당시 잠 안오는 밤에만 드문드문 봐서 아무래도 기억이 희미합니다. 네? 맞습니다. 저의 전공은 건축입니다.

사족 3. 액션영환데 액션은? 하고 궁금증을 가지실 분들도 많을텐데 액션은 대체 언급을 안 했군요 제가… 우리나라에 상영이 될거라 믿습니다만, 액션은 아마 예고편에서 보실 수 있는게 거의 다일 것 같습니다. 영화 절정부의 총격전은 너무나 긴장감이 떨어져 좀 실망스럽습니다만, 나머지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다 여주인공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렵니다.

 by bluexmas | 2005/12/04 13:57 | Movie | 트랙백 | 덧글(3)

 Commented at 2007/12/28 01:1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12/28 01:1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1/02 11:45 

맞아요, 아마도 원작자는 한국계, MTV의 만화였을텐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안 봐도 별로 마음 아플 것은 없는 영화에요. 가타카도 텔레비젼에서 조각조각 보았는데, 생각보다는 훨씬 재미있더라구요. 우마 떠먼을 워낙 좋아해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