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소설

맛있는 소설은 새옹지마와 전화위복의 결과물이다. 2019년 여름께, 한 방송국으로부터 교양 프로그램 출연 제안을 받았다. 주제를 정해 일련의 강연 영상을 제작하고 책도 출간하는 기획이었다. 좋은 기회라 생각했으므로 선뜻 응했고, 소설 속의 음식을 탐구하는 기획을 제안했다. 당시 이미 일간지에 영화 속 음식을 살펴보는 격주 연재(‘필름 위의 만찬’)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비슷한 접근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콘텐츠였다.

프로젝트는 제안하는 단계까지만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소통이 매끄럽지 못했고 대우도 나빠, 나는 결국 녹화 직전 출연 결정을 철회했다. 그렇게 방송의 기회는 물 건너 갔지만 책의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출판기획안을 만들어 돌렸는데 마침 ‘외식의 품격(2013)’을 함께 만든 편집자 P가 관심을 가져 다시 뭉치게 되었다. 이게 새옹지마와 전화위복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왜 하필 소설 속의 음식인가? 전업 필자가 된지 내년이면 15년, 글쓰기의 뿌리를 되짚어 보고 싶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정말 죽어라 책을 읽었는데 대부분이 동화였다.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 관심이 초등학교 5학년때 읽은 세계 문학 전집을 통해 소설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이후에도 나는 소설을 열심히 읽었고 전업 필자가 되는데도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나는 음식평론가이니 소설 속의 음식을 탐구하는 작업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사정이 이렇기에 그 어린 시절 문학 전집의 작품들부터 골랐다. ‘바늘 없는 시계’, ‘작은 아씨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노인과 바다’ 등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던 명작들이다. 여기에 단순히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상으로 좋아한 작품들을 시대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 끌어 안았다. 그 결과 미취학 아동 시절에 읽었던 ‘초콜릿 전쟁’과 동시대 소설인 ‘아메리카나’의 이야기가 한 울타리에 모인 책이 되었다.

식사를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소설 속 음식을 탐구했다. 각 작품이라는 중심 식재료, 혹은 요리를 중심으로 식사라는 총체적 경험이 충만해지는 걸 염두에 두었다. 소설이 재료라면 잘 어울리는 조리법이나 요리 양식을 찾아주었다. 이미 요리인 상태라면 맞는 집기 등을 준비해 식탁을 아름답게 차려준다는 느낌으로 접근했다. 메뉴 해설(‘바베트의 만찬’), 식문화 조망(‘먹는 존재’, ‘채식주의자’), 2차 창작(‘82년생 김지영’)까지 다양한 결의 글을 담았다.

그리고 하루키가 있다. 소설 속 음식을 탐구한다면 하루키를 절대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작품 속에서 음식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빛나는 가운데 하루키만의 특별함이 분명히 있다. 따라서 좋든 싫든 그의 음식을 다루지 않는다면 작업의 정당성이 살지 않는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절대 섣불리 접근할 수 없다. 하루키가 그런다고 나도 망둥이처럼 낭만적으로 접근한다면 실패하기 쉽다. 인생의 어느 기간 하루키를 열렬히 읽었던 독자로서 늘 주지해왔던 바다. 그렇기에 하루키는 이 책 작업의 가장 큰 부담이었지만, ‘책 속의 책’ 개념으로 그의 음식 세계 또한 한껏 정리해보았다.

그렇게 ‘맛있는 소설’을 차려 낸다. 완성하고 나니 모든 메뉴가 충실한 뷔페 같은 느낌이 든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마음껏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22년 내내 원고를 썼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고 버거웠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 가며 썼다. 이제는 침대에서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2023년 11월

이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