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룽지의 아이러니
광화문 인근의 어느 개인 카페에 앉아 있다가 비명을 들었다. 끼아아아악.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지?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직원이 크로플을 만들고 있었다. 방실방실하게 부풀어 오른 크루아상 생지를 프레스에 집어 넣고 누르고 있었다. 끼아아아악. 나는 얼른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온 나라에서 만행이 벌어지고 있다. 열과 성을 다해 켜를 살리고 부풀린 크루아상 반죽을 눌러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 오로지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부풀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켜는 대체 뭐하러 살리는가? 왜 켜를 살리기 위해 제반 공정에 에너지를 소비하는가? 나는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그나마 크로플은 양반이다. 그렇게 한껏 살린 켜가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 잘 살펴보면 쿠잉 아망처럼 켜켜의 페이스트리 반죽을 눌러서 굽는 빵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크룽지에 이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켜는 몰살당하고 없다. 그 얇디 얇은 결과물에는 그 많고 많은 켜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크룽지는 딱딱하다. 아니, 바삭한 게 아니다. 그건 딱딱한 거다. 질긴 걸 쫄깃하다고 철썩같이 믿듯, 우리는 딱딱한 걸 바삭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런 크룽지가 대량생산되어 기성품으로 편의점에서 팔리고 있다. 처음 보고 깜짝 놀랐다. 원형인 크루아상이 이렇게 대중적으로 팔리지 못하고 있는데 특성을 완전히 죽여버린 크룽지는 팔리고 있다니. 크루아상을 결국 죽여야만 크룽지로 살아나 대중성을 얻는 이 기가 막힌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처참히 죽여버리기 위해 한껏 살리는 이 잔혹하고도 가학적인 접근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나는 무섭다. 이 현실이 너무나도 무섭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