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라면

에휴. 페이스북에서 어떤 교수의 라면 너스레를 보고 탄식했다. 또 나이브한 교수님이 한 건 하셨네. 곧 다들 야단법석을 떨겠군. 아니나 다를까, 하루만에 자칭 ‘라면의 새역사’는 페이스북을 넘어 트위터까지 ‘바이럴’이 됐다.

그리고 나는 화가 났다. 누구의 말마따나 ‘그냥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씁쓸한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 설민석의 창작에 가까운 역사 강의에 대학교수들이 항의를 한 결과 그가 퇴출-자진이든 타진이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름 삶과 열정을 바쳐 한 학문의 끝까지 파보았노라고 자부심을 품는, 또한 자부심을 품어도 된다고 사회가 용인하다시피하는 교수들이라면 박사도 없고 전공도 연극영화인(대학원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설민석이 몹시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수들은 자기 분야가 아니라거나 지식과 정보가 충분치 않더라도 아무 주장이나 막 펼쳐도 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지만 그런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사회가 교수를 전공 지식을 넘어 인생과 철학과 교양의 소양까지 쌓은 종합 지식인이라고 묵인하는 탓인데, 내가 알고 또 공부하면서 겪어본 교수 혹은 지망생들은 그런 경우가 드물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는 한층 더 심하다. 눈치도 재치도 공감능력도 대체로 없을 뿐더러, 자기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생활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우울증이 오도록 현지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배우자를 집에다 두고 그가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그가 빨래해준 옷을 입고 학교에서 열심히 열심히 공부만 했다 (물론 여성도 그런 부류가 없지 않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교수라는 집단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

각설하고, 영양가 없이 바이럴이 된 라면의 유사과학적인 접근은 다음과 같이 논박할 수 있다. 나는 물리학 박사학위 소유자도 아니고 다른 분야 석사만 가지고 있을 뿐더러 그마저도 거의 문과에 가까웠지만, 대학교 2학년까지 배웠던 공업수학이나 정 및 동역학 수준으로도 충분히 과학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아니, 사실 고등학교 물리 화학 수준이면 충분하다.

1. 우리에게는 이미 냄비에 끓이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있다. 용기면 말이다. 끓이지 않고도 빨리 제대로 익도록 용기면의 면발에는 전분이 많이 함유돼 있다.

2. 냄비에 끓이지 않고 일반 라면을 먹으려 애쓰는 이들을 위한 해법도 따로 있다. ‘뽀글이’말이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서 매점에서 학생들이 뽀글이 먹는 광경을 처음 목도했으니 적어도 역사가 19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조리법 혹은 음식이다.

3. 면발의 조리는 비단 물성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물에 끓으며 면발로 스프의 맛도 스며들어간다. 따라서 면발의 조리를 물성의 변화로만 가정한다면 일단 전제부터 틀린 것이다.

4. 라면에게는 아주 멀쩡하고도 훌륭한 레시피가 있다. 식품 공학 등의 전공자가 실험을 거쳐 완성한 레시피이다. 우리는 이런 레시피를 적어도 60년 이상 참고해왔다.

5. 물이 끓고 최장 5분이면 라면을 먹을 수 있는데 그 시간을 못 들인다면 라면을 먹으면 안되는 것 아닐까? 교수가 제안한 “혁신적인” 조리법은 무엇보다 라면 끓이는 시간을 상수에서 변수로 바꿔 버리기 때문에라도 비효율적이다. 레시피를 따를 경우 물 끓으면 면 스프 넣고 X분 끓인다면 타이머 맞추면 끝이다. 굳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라면은 익으니 ‘unattentive cooking’이 된다.

6. ‘한식의 품격’ 맨 앞에서 다뤘듯 라면은 한국 최초의 현대적인 대량생산 음식이고 역사도 60년 이상 됐다. 그만큼 봉지의 레시피도 완성됐고 실패 없는, 확실한 결과를 보장할 가능성이 엄청 높다. 그런데 왜 굳이 엉뚱한 방법으로 끓여야 하는가?

7. 라면을 찬물에 불려서 끓일 경우 결과가 뜨거운 물에 끓인 것보다 열등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라면 면발은 표면에 무수한 기공이 난 다공질이다. 이 속성을 제대로 불어 넣기 위해 모모푸쿠가 수없는 실패를 겪다가 (자살 직전) 술 마시러 가서 뎀푸라를 보고 튀김을 적용해서 나온 결과. 이런 속성의 면을 찬물에 끓이기 시작하면 온도에 의한 변화보다 수분에 의한 변화의 영향이 커지면서 면이 익기보다 불 가능성이 높다. 겉만 불고 속은 덜 익을 것이다. 라면은 ‘알 덴테’로 먹어야 하는 면 음식이 아니다.

8. 또한 스프의 맛도 면발이며 국물에 덜 배어들 가능성이 높다. 스프는 기본적으로 지방+(고춧)가루 향신료이니 뜨거운 물에 더 잘 녹고 맛을 발달시킨다. 찬물에는 덜 녹고 덜 발달된 국물이 면발에 배어든다. 그 결과 라면 전체의 맛이 덜 발달될 수 밖에 없다.

9.라면을 찬물에 끓이면 더 효율적이고 맛도 좋아진다면 이미 제조업체에서 그런 제품을 내지 않았을까? 라면 시장은 과포화 상태라 언제나 치고 나갈 한 방을 노리고 있는 현실인데?

이게 정말 엄청난 수준의 과학까지 생각해야 되는 사안인가? 당연히 아니다. 다만 교수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권위에 기댄다고 생각하고 난리법석을 치는 것이다. 실제로 싸구려 바이럴 계정에는 ‘찬물에서 라면 끓이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스펙이 심상치 않다’ 같은 코멘터리와 더불어 교수들의 이력을 캡처한 이미지가 돌았다.

학벌은 사람이 라면마저 잘 알 가능성은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믿기에 한국의 라면은 너무 훌륭하고 많은 (소위 “스펙”도 훌륭할) 전문 인력이 오늘도 흰 랩코트를 입고 열심히 개발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가 무시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라면을 찬물에 끓이면 더 맛있다던데요’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에 반박 또는 설명해야 하는 피로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검증된 정보와 지식을 거부하는 추세에 너무 맞아 떨어지는 현상을 지식 사회의 최상위자인 교수가 퍼트렸다. 누군가의 바람대로 웃자면 정말 한없이 웃을 수 있는데, 그 안에서 겪어본 사람으로서는 솔직히 아이러니함에 라면이 목구멍으로 잘 안 넘어갈 지경이다. 한편 당사자는 ‘포스팅을 보고 방송국과 유튜브 채널에서 연락이 왔다’라고 공공연히 드러내는 걸 보면 정말 자신 혹은 인용한 동료 연구자의 물리학적 지식과 통찰력으로 일반인과 라면의 세계에 보탬이 되었다고 진지하게 믿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자체가 굉장히 씁쓸한 코미디이다.

이런 의견을 트위터에 올렸더니 다시 한 번, ‘웃어 넘기면 될 일인데 왜 그러느냐’는 반응이 있었다. 직업인으로서 직업적인 의견을 밝히는 게 웃어 넘기기보다 더 원래 의견을 존중하는 행동이라 믿는다. 솔직히 존중할 만한 의견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반응이 내가 베풀 수 있는 최선 및 최고의 대접이다.

한편 ‘라면 가지고 왜 그래?’라고 생각할 이들에게는 내가 음식 평론가이므로 반응할 뿐이지, 실제로 이런 문제가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제 전공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 서 민 교수나, 종합 교양인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학교 밖에서도 확실히 구축한 김영민 교수가 좋은 예이다. 우리에게는 이들의 전공 분야 바깥의 통찰력을 굳이 신뢰할만한 이유가 없다. 다만 이들이 한 분야를 체계적으로 열심히 공부했기에 그 방법론과 통찰력을 다른 분야에도 일정 수준 발휘할 수 있노라 믿을 뿐이다. 하지만 그 믿음이 과연 얼마나 호응을 받았는가?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캐릭터들이 대체로 40대 이상의 남성들이라는 사실에 당연히 주목해야 한다. 사회는 아직도 이들 위주로 돌아가고 있으므로 위상이며 플랫폼과 발언권 또한 이들이 선점하고 있다. 덕분에 이들은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고도 크게 검증 받지 않는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의식을 못하고 오히려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가장 크게 벌어지는 분야가 바로 음식이다. 먹어 보았기 때문에 다들 한 마디씩 하는 분야. 전문 지식이 존재하지만 내가 모르기 때문에 없다고 굳게 믿는 분야.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이 일로 밥을 벌어 먹는 사람은 남들이 다 웃는데 절대 따라 웃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릴 수 밖에 없다. 이런 부류들은 오늘도 나 같은 사람이 들이미는 문제 제기의 원인이 자신들의 전문성 부재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의 무의미한 과잉 탓이라 보고 적개심을 품는다. 교수라고 라면을 업신여겨도 되는 건 아니다. 교수라면 자신의 특권을 헤아리고 자기 연구와 학생들의 안녕에 더 신경쓰자. 우리 모두 라면과 만드는 이들을 좀 더 존중하자. 라면 귀한 줄 좀 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