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6-해맑음을 찾는 해맑음
어제는 굴러다니는 트윗 하나를 보고 화가 났다. 그렇다, 아 바보들 또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있네라며 그냥 비웃고 넘길 수 있는 게 아닌, 드물게 진짜 화가 나는 트윗이었다. 알 것 다 알고 겪을 만큼 겪었는데 해맑은 사람이 좋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런 류의 발화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난다. 일단 타인을 해맑다 어둡다 따위의 층위나 양상으로 나눠 평가할 수 있다고 믿어 버리는 일종의 포지셔닝이 싫다. 자신은 좀 더 높은 위치에 있기에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밝다-어둡다 따위의 레이블링 자체가 무례하다고 여긴다. 사람이 밝다/어둡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그에 대한 과학적이고도 객관적인 평가 혹은 분석 요인이 존재하여 어떤 사람이 겪을 만큼 겪었는데 어둡다면 문제인가? 인성 혹은 인품이 그렇게 얄팍해서 밝다-어둡다 수준에서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한 술 더 떠 이런 말을 면전에서 당사자에게 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조차 몰라서 그렇게 무례하게 군다.
세 번째로 정형화의 문제가 있다. 저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이들은 자신이 고난이 어두운 인간을 만든다는, 또한 어두운 인간이 나쁘다는 정형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 못한다. 그리하여 넷째, 사람을 마치 물건처럼 평가하는 무례를 저지른다. 마치 어제 먹은 스콘의 버터향이 풍성해서 맛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취향의 소유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애쓰다가 사람마저 물건처럼 다뤄 버린다. 술자리 대화로도 별로일 것 같은 화제를 얄팍한 취향 전시의 도구로 삼아버린다. 해맑은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해맑은 사람은 자신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 투명하게 나이브한, 악한 해맑음 말이다.
고난과 고통은 인간을 만들 수도 바꿀 수도 박살내 버릴 수도 있다. 또한 그 여파를 아마도 평생 걺어지고 살야아 할 수도 있다. 그 모든 단계와 과정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상관 없이 고난과 고통의 장본인은 계속해서 과거 그리고 과거의 자신과 싸우고 있으며 그 싸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양태가 누군가에게 해맑음으로 비친다면 보는 사람의 잘못이다. 사람은 복잡한 존재이다. 심지어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수많은 켜를 감지할 수도 있다. 너무 들여다 보는 것, 본 것에 대해 묻는 것 등등도 문제일 텐데 아예 그 전 단계에서 나아가지도 못하고 나에게는 안 보이니 없다고, 이게 전부라고 사람에 대해 말하는 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례한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