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빵이와 식빵
이 글은 조선닷컴에 격주로 연재하는 ‘이용재의 외식의 품격‘의 원본이다. 이름을 지어준 고양이 식빵이의 이야기로부터 자연스럽게 식빵의 색깔과 맛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큰 꿈을 안고 썼으나… 편집되었다. 편집이야 늘 있는 일이고 게재된 걸 읽어보니 더 나은 결정이었다는 납득이 바로 들었지만 사진까지 받아 놓은 게 너무 아쉬워 여기에 올린다.
작년의 큰 성취 하나를 꼽자면 단연 고양이 작명이다. 사연은 이렇다. 지인이 몇 년 동안 챙겨주던 길고양이를 입양하고는 ‘맹꽁이’라 이름 붙였다. 얄궃게도 입양 직후, 맹꽁이가 임신 중임이 밝혀졌다. 그렇게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가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한 마리가 곧 죽고 남은 넷 가운데 셋이 입양을 갔다. 남은 둘째 아기 고양이의 작명 의뢰가 들어왔는데 마침 노릇한 줄무늬의 ‘치즈 태비’였다. 털 색깔에서 착안해 ‘식빵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제 9개월령인 수컷 식빵이는 엄마인 맹꽁이와 함께 산다.
음식(꿀떡)부터 생선(꽁치)까지 고양이에게 벼라별 이름을 붙이니 ‘식빵’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고 믿었다. 털 색이 아니더라도 고양이는 원래 식빵과 가깝다. 고양이가 다리를 접고 웅크려 앉는 자세를 ‘식빵 굽기’라 부르기 때문이다. 모양이 그렇다면 치즈 태비의 일반적인 노릇함은 ‘식빵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색깔’이다. 조금 짙어지면 거의 갈색이 되는, 채도가 낮은 노란색으로 영어로는 금갈색(golden brown)이라 일컫는다. 빵의 색이 이보다 옅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잘 익지 않아 밀가루 냄새를 풍긴다. ‘밀가루 음식은 소화가 잘 안된다’는 통념도 궁극적으로는 덜 구운 빵 탓이 아닌가, 가설을 세워둔지도 몇 해 되었다.
‘혹시 좀 더 색깔이 나게 구우면 탄 것 아니냐고 물어보나요?’ 식빵을 사면서 언제나 던지는 질문이다. 실제로 많이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인데 대답은 십중팔구 ‘그렇다’이다. 과연 색이 진하게 난 빵은 탄 것일까? 빵을 좋아하더라도 품을 수 있는 오해이다. 같은 밀가루 반죽이라도 익히는 방식에 따라 색깔이 달라질 수 있다. 찜은 수증기로 반죽을 익히는데, 물의 끓는점이 섭씨 100도이니 최고 온도도 같다. 반면 전기나 가스 등으로 공간을 가열하는 오븐은 기본적으로 섭씨 230도 이상으로 온도를 올릴 수 있고 식빵은 더 낮은 165~180도에서 굽는다.
그래도 찜보다는 높은 온도이기에 반죽은 몇 단계에 거친 변화를 겪는다. 일단 열에 의해 수분이 빠지는 한편 반죽을 발효시킨 효모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반죽을 좀 더 부풀린다. 일정 수준 수분이 날아가고 나면 140도부터 반죽의 당과 아미노산이 열과 반응해 색깔이 진해진다. 하얀 반죽에 고양이 식빵이의 색깔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초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 ‘마이야르 반응’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찜에 비해 색이 변한 부분의 맛이 한결 더 복잡해지는 한편, 부드러운 속살과 질감의 대조도 또렷하게 이룬다. 한마디로 색이 좀 나야 식빵이 더 맛있어진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로 허여멀건 가운데 식빵이 약간 유행을 타고 있다. 거의 모든 빵집에서 식빵을 팔지만 그와 별도로 전문점을 표방하는 가게들이 등장한 것이다. 부담 없는 동네의 프랜차이즈부터 일본의 장인정신이나 프랑스의 밀가루를 들여와 한 덩어리에 만 원 넘는 가격표를 붙이는 식빵 전문점 말이다. 가격대가 올라갈 수록 추구하는 식빵은 완전히 일본화된 ‘쇼쿠팡’이다. 미국식의 샌드위치빵과 일본식 식빵은 똑같이 생겼지만 질감이 확연히 다르다. 후자가 훨씬 더 보드랍고 폭신한데, 뜨거운 물에 밀 혹은 쌀가루로 쑨 풀이나 다름 없는 ‘탕종’이 비결이라 통한다. 하지만 현대 제빵을 집대성한 ‘모더니스트 브레드’의 연구 결과의 의하면 탕종은 부드러움의 정도 차이보다 유지 기간을 늘려주는 효과만 줄 뿐이며, 진짜 부드러움의 열쇠는 설탕이나 버터, 계란 노른자 같은 지방이라고 분석한다.
과연 전문점은 보다 일반 빵집에 비해 더 나은 식빵을 파는가? 그런 곳도 아닌 곳도 있다. 먼저 그런 곳 두 군데를 살펴보자. 첫 번째 전문점인 ‘밀도’는 식빵의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적절한 맛과 질감을 뽐낸다. 단맛이 주도권을 분명히 잡고는 있지만 ‘달다’는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오지는 않을 정도로 잘 숨겨져 있다. 한편 속살은 적절한 수준에서 저항을 받아 끊기는, 길들여진 부드러움을 품고
두 번째 식빵은 연희동의 ‘곳간’이다. 이곳에서는 주인이자 제빵사의 이름을 딴 ’전세계빵(5,000원)’ 단 한 가지만 파는데, 일반 식빵보다 버터를 많이 써 브리오슈에 가깝다. 버터 등 지방을 많이 쓸 수록 밀가루 반죽의 쫄깃함을 책임지는 단백질인 ‘글루텐’이 짧아져 빵의 속살이 부슬부슬해진다. 따라서 일반적인 식빵과는 질감의 결이 달라 높은 온도에서 오래 구우면 부스러질 수 있다. 따라서 살짝 구워 버터를 한 켜 가볍게 깔아주고 좋아하는 잼을 올려 먹으면 맛있다. 한편 곳간은 특이하게도 무인판매를 한다. 빵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시각을 빼고는 ‘동네 가게로서 고객님들과의 유대관계를 우선시 해야 한다는 스승님의 철학을 저희의 방식대로 실천하는 과정’이라는 요지의 안내문을 걸어놓고 주인은 퇴장한다.
다음은 만족스럽지 않았던 두 군데이다. ‘프리미엄 식빵’의 선봉장 역할을 한 신사동의 ‘식부관’에서는 식빵 한 덩어리에 최고 12,000원까지 받는데, 균형이 안맞을 정도로 단맛이 두드러지는 한편 질감도 대체로 푸석푸석하다. ‘내추럴’, ‘플레인’, ‘리치’의 세 종류를 팔지만 의미 있는 차이를 느끼기도 어렵다. 마치 조각이나 가방, 신발과 같은 상품처럼 진열하는 시도는 좋지만 빵이 직사광선에 노출되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네 번째는 개업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공덕동의 ‘타쿠미야’이다. 상호(장인의 가게)가 말해주듯 일본의 장인 정신을 표방하며 굽거나 버터, 잼 등을 바르지 않아도 맛있다는 의미로 이름 붙인 ‘생식빵(9,000원)’을 선보인다. 하지만 단맛이 식부관보다도 더 두드러져 아침식사용으로는 선택하기 꺼려질 정도이며 굽지 않았을 때 탄성이 조금 부족해 스펀지를 씹는 느낌이 난다. 여느 식빵 한 쪽 두께의 두 배도 넘을 2.8센티미터의 두께도 유쾌하지 않은 질감에 한 몫 보탠다(다른 두께로는 썰어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작은 요령 하나. 마음에 드는 식빵을 샀다면 어떻게 두고 먹는 게 좋을까? 빵은 두고 먹는다면 전분의 노화로 삭는 것을 막기 위해 냉동보관이 필수이다. 매장에서 담아주는 봉지보다 좀 더 두꺼운 냉동실용 지퍼백에 담아 보관하다가 먹기 30분 전에 상온에 꺼내 두거나, 아니면 냉동된 상태 그대로 토스터에 구워 먹을 수 있다.